나에게 왜 그렇게 가혹했을까.

- 두 번째 상담 후, 가벼움

by 너울

"오늘 가장 많이 표현하신 감정이 '버티지 못했다', '도망쳤다', '실망시켰다'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저는 이 모든 말들에 조금도, 정말 0.001%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듯 말했던 '실패'와 '도망'이라는 단어들을, 선생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귓가에 꽂히는 동의할 수 없는 문장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상담 선생님의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안 어딘가에서 누군가 피식, 실소를 내뱉는 것 같았다.


'그래서요? 선생님의 생각이 무슨 소용이죠?'


타인의 평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이미 나를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만약 30년쯤 후에, 너울님의 딸이 자라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실망하실 것 같나요?"


"아니요. 당장 그만두라고 하겠죠. 충분히 애썼다고, 더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줄 거예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고, 말을 마친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왜 그렇게도 가혹했을까.


왜 늘 나만은 더 버텨야 하고, 더 잘해야 하고, 더 오래 견뎌야만 한다고 믿어왔을까.

언제부터 '나다운 것'이 남들보다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을까.

늘 무능력해 보일까, 실수해서 비난받을까 겁내며 필요 이상으로 일에 매달려 왔는데... 왜 지금은 타인의 평가를 그저 '뻔한 위로' 정도로 치부해 버리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나를 돌보는 방법을 모른 채 쉬지 않고 채찍질만 해온 게 아닐까.


"너울님의 가족들도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토닥여주고 싶을 거예요. 지금까지 너울님과의 대화를 통해 바라본 가족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스스로를 해치던 곳에서 빠져나온 것뿐이에요. 그동안 억지로 버틸 필요조차 없었던 일이죠."




상담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을 때, 갑자기 주변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늘 걷던 거리.

바쁜 걸음으로 수없이 오가던 길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평일 오전의 한적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비로소 조금 가벼워진 내 마음 때문이었을까.


커피 한 잔을 사서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아득한 차소리, 잔잔한 햇살, 스치는 바람, 흔들리는 나뭇잎, 사람들의 나지막한 속삭임까지...

모든 것들이 내가 알던 것보다 한결 가벼웠다. 마치 중력이 줄어들어 세상 모든 걸 조금 느슨하게 바꿔놓은 것처럼.


그 순간만큼은, 정말 모든 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그렇게 믿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