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멍 때리고 싶다.

- 산사에서, 생각에 잠기다.

by 너울

'욕먹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상담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내게 온전한 '쉼'을 선물하기로 한 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집을 벗어나 보기로 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조용히,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지내기로.

그래서 템플스테이를 찾아봤고, '나는, 멍 때리고 싶다.'는 프로그램 명에 이끌려 대원사(가평)로 장소를 정했다.

입/퇴실 시간만 지키면 되고, 공양과 예불 참석도 자유로운 자율형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내겐 딱 맞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라 산책은 짧게 마무리하고, 소담한 전각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하염없이 산을 바라봤다.




몇 시간이고 바라본 산은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여름답지 않은 시원한 바람은 가까운 곳에 있을 계곡을 상상하게 하다가도, 문득 공기의 흐름이 툭 끊겨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건 아닐까. 엉뚱한 불안감에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 보았다.


저 아래 아득하게 보이는 작은 마을이 선명하다가도, 순식간에 산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제법 익숙해진 그 풍경은 반나절에도 몇 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안갯속에 갇힌 듯, 어쩌면 구름 위를 여행하듯, 황홀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모양새가, 지금의 나와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저녁 무렵에는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이나 싶었는데 눈 깜짝할 새, 밤의 어둠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렇게 산사에서의 밤은 기척도 없이 찾아왔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내게 들이닥친 우울증처럼.


'나는, 멍 때리고 싶은데...'

산은 계속해서 내게 풀어야 할 숙제를 건네는 것 같다.

아니. 산은 고요한데...

그런 산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앞의 풍경이 쉴 새 없이 변했다.

산은 분명 그대로인데...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기쁨과 고통, 안도감과 절망, 기대와 불안....

하루에도 수없이 널뛰는 내 마음은 산일까, 아니면 풍경일까.


마치 내가 내가 아닌 듯, 낯설고 당황스러운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산이기를 소망했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산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듯.

이 시간이 지나면, 본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진짜 나'와 마주할 수 있기를.




구름이 발아래 흐르고, 풀벌레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우는 산사의 아침.


짙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힘차게 떠오르고 있을 태양을 그려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발아래를 내려다봐도 온통 안개뿐이지만...

고즈넉이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와 함께, 해는 분명히. 이미 떠올랐다.


산사에서의 휴식. 그 끝자락에서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을 새겼다.

지금은 보이지도, 찾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내 안의 단단한 무언가를, 믿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