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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남미에서 만난 사람들

by OHNUS


검증된 곳을 주로 찾아다니는 한국인 여행자들의 패턴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한국인들은 가는 곳만 가’라며 비꼬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낯선 곳에서 맞닥뜨리게 마련인 난처, 불편, 불쾌한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 그냥 검증된 곳으로 가볼걸 하는 후회 한번쯤은 하게 될 것이다.


혼자 여행 다니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숙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 취향이며, 한국인들이 모인 분위기가 싫다거나 그런 경향을 비웃고 싶어서는 아니다. 굳이 외국까지 나왔는데 또 한국인하고만 다닐 필요가 있나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1년여의 타지 생활을 마치고 시작한 남미여행은 경우가 좀 달랐다. 첫번째로는 치안 걱정 때문에 무작정 혼자 돌아다니며 아무나 만나서 대충 같이 다니기가 좀 부담스러웠다. 두번째로는(사실 이게 진짜 이유인데) 외국에서 부대끼다보니 한국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편안함이 좀 그리워졌었다. 길이 맞닿는 한국인을 만나지 못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카, 아레키파를 지나 새벽녘의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들이 많다는 엘푸마 호스텔로 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고산지대의 공기를 마시며 힘들게 돌계단을 올라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방에 짐을 부렸다. 아니나다를까 방 바깥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한국인 투숙객들의 시끌시끌한 목소리들이 와락 들려온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말 목소리들에 좀 당황했다. 와 이건 내일로 게스트하우스 수준인데, 싶을 정도다. 문득 고개를 든 반골 기질에 호스텔을 옮겨볼까 하다가, 이내 내가 좋아서 찾아와 놓고 뭔소리냐며 스스로를 설득해냈다.


홀로 여행하는 것과 여럿이 여행하는 것에는 분명한 일장일단이 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만드는 맥주를 맛보고 싶을 때나 유난히 좋은 특산 음식을 만났을 때, 혹은 이것은 평생 가는 기억이 되겠구나 하는 좋은 것을 마주했을 때, 그런 순간에는 항상 내 옆의 누군가가 아쉽다. 감정은 공유될 때 더 진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두 명이 되면 비로소 카메라 프레임에 내가 피사체가 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나라서, 혼자 도착한 목적지에서 아무나 붙잡고 부탁한 사진 속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익숙치 않은 자가 찍어주는 내 사진만큼 어색하고 작위적인 것도 없다. 단지 장소를 옮겨다니는 것, 그 장소에 내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나는 물론 찍히는 것보다는 찍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여행의 순간순간에 여행자로서의 내가 좀 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한두장 정도 가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심이다. 그 뿐인가, 둘이 있어야 식당에서 요리를 기다릴 때 시간이 더 잘 간다.


그러나 사람은 변덕스럽다. 특히 애초에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을 위해서는 한 명이 더해져서 세 명일 때가 좋다. 서로가 서로의 대안이 되어주고 완충이 되어줄 수 있는 셋. 이때부터는 다수결이라는 멋진 시스템의 도입도 가능해지기에 뭔가를 결정하는 것도 수월하다. 하지만 삼형제, 세자매가 그렇듯 언젠가는 더 친한 둘과 그렇지 못한 하나가 생겨나기 마련, 그래서 셋보다는 넷이 더 안정적이다. 탁자다리 네 개가 주는 안정감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동행이 넷이 되면 안전함과 안정감이 있고 그걸 기반으로 한 자신감도 생긴다. 버스 이동이 잦은 남미에서는 정확히 짝을 이루어 좌석을 차지하기도 좋다. 하지만 짝수로 나뉘어진다는 것은 편이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홀수가 좋다. 하지만 다섯이 되면 택시를 잡기가 애매해진다..


엘 푸마에서 묵는 동안 끊임없이 생겨나는 동행들과 쿠스코 곳곳을 쏘다녔다. 익은 얼굴이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얼굴이 더해지기도 한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그 다음 끼는 그 곳에서 함께 하고, 알파카인형을 싸게 파는 기념품 가게를 발견하면 그 다음날 다시한번 우르르 방문했다. 여행사 정보를 비교하고 쿠스코 근교를 돌아볼 가장 싸고 괜찮은 투어가 무엇인지 서로 머리를 맞댄다.


함께 하는 여행의 양상은 혼자 하는 여행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즐거움도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느낄 필요 없던 책임도 생겨난다. 맛있는 식당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입에 맞지 않아 하는 동행이 있으면 그 어긋남과 미안함은 일행 전체가 나눠가져야할 몫이 된다. 사실은 별로 끌리지 않는데, 알려주는 성의를 생각하면 같이 해야할 것 같은 체면치레의 문제도 생긴다. 의외로 맘에 들었다면 최선의 결과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또다시 악순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쿠스코가 좋았다. 도시 자체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이 참 좋았다. 지구에서 가장 먼 대륙에 올 이유가 있었던 사람들, 에펠탑보다는 마추픽추를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은 그 모든 책임과 선택과 체면의 함정들 사이에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만큼 튼튼한 고리였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연결고리, 혹은 교집합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 아래 때로는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함께하는 여행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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