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을 보고
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를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프로메테우스] 후속작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차에 불쑥 개봉한 이 영화의 개봉 시점이 너무 이상했다. 이 타이밍에 이 영화가 굳이 개봉해야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영화는 퀄리티가 애매했고, 시나리오도 어설펐고, 결국 흥행도 망했다. 하지만 영화 크레딧 말미, 자살한 그의 동생 토니 스콧에 대한 헌정의 문구가 나올때 이 성경이야기에서 형제의 관계를 말하고자 했던 노감독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넘겨짚기 일지도 모르지만 2012년 세상을 떠난 토니 스콧이, 2014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형제 이야기에 미친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리시맨]을 보고, 오랜만에 비슷한 노감독의 고뇌를 느꼈다. 다만 리들리 스콧이 소재로만 티를 낸 것에 비해, 마틴 스코세지는 캐스팅, 스토리, 연출 모든 면에서 그의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커리어를 함께 해온 노배우들과 함께, 인생의 씁쓸함에 대해, 그가 가장 잘하는 시니컬한 작법으로 말한다. 디테일하게 쪼개어 배치한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조차 영화의 메세지를 표현하기 위한 한 요소다. 어쨌든 블록버스터의 탈을 썼던 [엑소더스]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개인적인 영화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엑소더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작이라고 느꼈다.
마틴 스코세지는 [아이리시맨] 개봉을 앞두고 마블 영화를 ‘시네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대충 헤드라인만 읽고 꼰대 아저씨의 꼰대짓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영화를 진득하게 다 보고나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
평생에 걸쳐 쌓아온 빛나는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곳은 넷플릭스 뿐이었다. 42년생 노감독에게,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사기로 재생되는 영화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어떤 제작사도 돈을 대줄 생각이 없었고, 어떤 영화관도 걸어줄 생각이 없었던 이 3시간 넘는 길이의 올드스쿨 명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트렌디한 플랫폼인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온전히 말하려면 극장에서 봐야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영화란 기본적으로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전제로 만들었기에 그것이 관객으로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실제로 극장에서 봤을 때와 모니터로 봤을 때 느껴지는 감정, 몰입감, 집중도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행여 상영시기를 놓쳐 모니터로 본 영화가 너무 재미가 없더라도, 투덜거릴 최소한의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아이리시맨]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가 너무나 멋진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인생의 무상함 못지않게, 감독이 느꼈을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무상함도 강하다. 감독은 영화 개봉시점에, 자신의 영화 뿐 아니라 다른 영화들도 핸드폰으로 보지 말길 권하는 인터뷰를 했다. 관객이 손짓 한번으로 언제든 영화를 멈출 수 있는 매체에서만 자신의 영화를 내놓을 수 있었던 감독이 포기하지 못했던 마지막 자존심 같은건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이 영화가 이런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영화 내외적 상황이 모두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넷플릭스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틴 스코세지는 그 넷플릭스 덕분에 그 어떤 영화보다도 영화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아이러니함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자세도 제각각 달라질 것이다. 30대를 지나는 나는 그 변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보게 될까. 기대감과 걱정이 동시에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젊고 야망에 찬 얼굴로 처음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이름 아래 새겨진 사망 연도와 사유처럼, ‘시네마’에도 이미 사망년도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