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v페라리] 감상
[포드v페라리]에는 수많은 명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대사는,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쉘비의 연설장면에서 나온 대사였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평생 일을 하지 않으므로, 엄청난 행운아’라는 대사였나. 쉘비는 이 말을 하며 마일스를 쳐다본다. 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사업가여야했던 그가 그 행운아로 지목한 것은 평생 함께 해온 마일스가 아니라 앞으로 그에게 엄청난 자본을 지원해줄 포드였다. 그런 ‘현실적’ 연설을 요구한 마케팅팀장 이아코카는 만족스럽게 웃고, 마일스는 서운함을 느끼며 자리를 떠난다.
쉘비 말마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사랑하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굳이 일을 사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쪽에 가깝다. 일은 일일 뿐, 삶에서 대부분의 행복은 다른 곳에서 찾게 되는게 보통 사람의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마일스같은 천재가 아니라 이아코카 같은 천재가 되길 꿈꾸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설 장면에서 포커싱되는 세 명의 주인공은 모두 복장이 다르다. 켄 마일스는 항상 기름 때 묻은 커버올을 입은, ‘장인’이다. 리 이아코카는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에 포마드로 머리를 빗어넘긴 ‘샐러리맨’이다. 캐롤 쉘비가 특이하다. 그는 정장을 입었지만 카우보이 모자를 썼다. 그는 ‘혼종’이다.
장인들은 자신이 만드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들은 그저 ‘잘하면’ 모든게 ‘잘될’거라고 생각한다. 마일스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서 포드GT를 만들고 그 차는 놀랍도록 훌륭하다. 그는 ‘잘했다’. 하지만 ‘잘되’진 못했다. 왜냐면 정장을 입은 샐러리맨들에게는 그 두가지 ‘잘’은 똑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들의 세계에서는 ‘위로 가면’ 잘하는 것이다. 이아코카는 그중에 그나마 튀는 인물인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의 사장과 부사장이 지시하는 일 중 어느하나 반대하거나 무산시키지 못한다. 그 철저한 상명하복의 세계에서는 윗사람의 판단력이 모든 것이다. ‘위’에 있지도 못한 주제에, 실패한 정비소 사장인 주제에 ‘잘’하기만 하는 오만한 장인은 그들의 세계에선 껄끄러운 존재일 뿐이다.
사실 가장 능력있는 것은 수트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혼종들이다. 그들은 적당히 타협할 줄 알지만 양보할 수 없는 선 역시 가지고 있고, 그 선을 상대방이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탁월한 수완과 능력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장인’들과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가장 피곤하고 가장 힘든 사람들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쉘비의 피곤한 표정을 보며, 실제 우리 세계에도 그 피곤함과 힘듬을 이기지 못한 혼종들이 무수히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 켄 마일스는 샐러리맨들의 이상한 셈법에 말려들어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덤덤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준 그의 친구 캐롤 쉘비를 도리어 위로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뿐이다. 그를 향해 경의를 표했던 엔조 페라리 때문에.
엔조는 장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어울리지 않는 수트를 입었다. 그러나 애초에 혼종이 아니었던 그에게 수트는 너무 버거웠다. 그는 쉘비처럼 능수능란하지 못했고, 마일스처럼 운좋게 쉘비라는 혼종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는 두 역할을 모두 하는데 지쳐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고, 행운에 가까운 하이재킹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샐러리맨의 세계에 굴복해야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력과 재능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그저 샐러리맨들의 세상에서 자기 나름의 어려운 승리를 힘겹게 찾아야하는 장인들의 고달픈 고군분투기로도 읽힌다. 그리고 마일스처럼 들이받든, 엔조처럼 받아들이든 그들은 대개 진다.
늘 장인을 꿈꾸지만 샐러리맨이 되어가는 나를 느낀다. 그러면서 멋진 혼종이 되길 꿈꾸게 되지만, 내 능력과 수완은 성공한 혼종이 되기엔 미치지 못함을 느낀다. 삼십대에 접어들며 더욱 느낀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현대의 샐러리맨들은 더이상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포마드를 바르지 않는다. 그들은 장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고, 그것이 그들의 트렌드 같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여전히 샐러리맨이며 강력한 ‘위아래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다. 그게 모두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