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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만드는 사람들

키토와, 뉴욕에서

by OH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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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만들다>


남미에서는 야경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밤거리를 함부로 쏘다니기 부담스러운 치안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숙박비를 아낄 겸 밤버스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갈라파고스를 등지고 도착한 키토에서, 공항에서 시내까지 들어가는 셔틀 버스 안에서 만난 키토의 야경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가 으레 그렇듯 키토도 한 도시 안의 지형이 고저차가 큰 편이다. 위쪽 도로를 지나가는 버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줄기에 주욱 깔린 빛무리들이 인상깊었다.


미국에서는 야경을 참 많이 봤었다. 특히 뉴욕의 야경은 듣던 것 이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들은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키토처럼 산에 둘러안겨 있거나, 볼리비아의 라파즈처럼 움푹한 구덩이에 들어차 있는 형상이거나. 그래야 위쪽 지형에 서서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은 그렇지 않다. 뉴욕은 바다에 접해있으며, 맨해튼은 바다로 흘러드는 거대한 두 물줄기 사이에 자리잡은, 고저없는 편평한 땅이다. 맨해튼을 둘러싼 브루클린, 아스토리아, 뉴저지에도 높은 지대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연지형의 유리함 대신, 이 곳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구조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맨해튼에 있는 가장 거대한 녹지조차 자연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다. 그리고 이 마천루의 숲은 발끝 너머로 내려다보거나 멀리서 관조하는 야경 대신, 좀 더 가까이서 압도하는 야경을 선사한다. 평평한 땅이니 산줄기나 둔덕에 가려지는 부분도 없다. 좌우로 거대한 강이 흐르지만 그 검은 표면은 마천루들의 현란한 빛을 반사하기에도 버거워보인다.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의 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압도적이다.


불빛들은 지면에 조밀하게 들어차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쏘아올리듯 위압적인 높이까지 치솟아 있다. 셀 수도 없는 불빛들이 셀 수도 없는 유리창, 거미줄보다도 촘촘한 도로, 그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자동차에서 쏘아져나온다. 별처럼 빛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별조차도 움찔하며 물러나게 만드는 자신만만한 빛이다.


뉴욕의 낮과 밤은 너무나 다르다. 이 곳만큼 다양한 사람을 짧은 시간에 볼 수 있는 도시도 없는데, 낮에 거리를 오가며 마주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인종에 따라, 국적에 따라,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 다른 모습들이다. 그러나 해가 지고 이 빛의 바다를 구성하는 그 모든 삶의 모습은 다 같아보인다. 그들은 곧 하나의 빛이다.


한국에 있을 때, 삶이 피곤하다고 여기는 직장인 친구들과 밤의 한강변에 나가서 맥주를 마시면 으레 한두번쯤은 하게 되는 이야기가 ‘남 눈엔 야경 내 눈엔 야근’이다. 폭소보다는 쓴웃음이 새어나오는 유형의 농담이다. 도시의 빛 빛 하나하나가 곧 이 도시에 존재하는 하나의 삶임은 세계 어딜가나 똑같다. 우리는 특별한 광경을 보고 싶어 야경을 찾아 나서지만, 끝내 눈에 담게 되는 것은 일상의 집합체다.


여행을 와서 야경을 보면 나는 나의 삶이 생각난다. 막상 살아낼 때는 잘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물 속의 물고기가 물을 대하듯 대하던 나의 시간들이 생각난다. 별 생각 없이 집에 들어와 방의 불을 켜고 노트북을 열어 챙겨보던 미드가 생각난다. 쉽사리 쉴 곳을 찾지 못해 잔뜩 걷고 나서 보는 야경에서는 내 자리가 있었던, 그리고 그 자리로 불러낼 수 있는 친구와의 술 한잔이 있었던 우리 동네가 생각난다. 인턴 시절 밤새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던 여의도의 빌딩도 생각나고 그 고생을 같이 하며 친해진 사람들도 생각나고, 무엇보다도 퇴근 후 가던 여의도의 포장마차와 김치찌개집이 생각난다. 나 또한 서울의 밤에 빛을 만드는 하나의 일상을 가지고 있었다. 꽉 막히고 답답한 나라요 도시요 일상이라고 여기며 그 곳에서 뛰쳐나오고 싶어들 하지만 그 밤들이 단 한번의 예외 없이 부정적이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망설이게 된다.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는 평화를 그 속에서 누린다. 여행과 타지 생활 속에 맞딱뜨리는 야경 속에 숨어있는 평화가, 낯선 곳에 발디디고 있는 여행자로서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사람은 땅에서 별빛을 쏘아올릴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야경을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이 내는 빛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광원은 빛을 만들지만, 역설적이게도 빛 한가운데 있기에 스스로의 빛을 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우리에겐 때로 자신의 빛을 끄고 타인의 빛들을 응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힘들고 지치는게 삶이지만 잠시 한숨 돌리고 사람이 만드는 빛을 보라. 우리는, 나는, 당신들은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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