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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쇼맨

영화에 대한 '선비질'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가.

by OH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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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인간의 잔인함과 그 역사의 비루함에 대해서 외면할 수 있거나, 외면하고 있거나, 외면하고 싶다면 <위대한 쇼맨>은 좋은 영화다. 만약 당신이 영화의 뒷이야기에 관심이 많거나, 관심을 가지려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싶다면 <위대한 쇼맨>은 당신을 갈등에 빠뜨릴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가 소재에 주는 면죄부는 어디까지일까. 실제의 바넘은 ‘서커스’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는 업적말고는 비루하기 짝이없는 인간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에 백인우월주의자, 돈만 밝히는 사기꾼에 수전노였다. 그는 딱히 고난에 가득찬 어린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캐스팅한 오페라 가수가 사랑에 빠질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고(제니 린드가 계약을 파기한 이유는 입장료를 더 받기 위해 혈안이 된 그에게 질려서였다), 가족을ㅡ그것이 진짜 가족이든 유사 가족이든ㅡ 아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 후에 나는 어땠는가. 스스로도 놀랍게도 나는 이 뻔뻔한 영화에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모른 상태로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뮤지컬 영화에 관객이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소재의 저열함만으로 외면해버리기에는 영화를 보며 느꼈던 내 즐거움이 너무 생생한 진짜였다.


분명, 영화는 위선적이고 뻔뻔하다. ‘모든 인간은 특별하다’는 멋진 주제는 ‘This is me’라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가진 단 한곡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상류 사회의 허영을 향한 비판도 같잖기 그지없다.


동시에, 영화는 황홀하고 강렬하다. 휴 잭맨은 여전히 멋지고,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Freak들이 펼쳐놓는 노래와 군무는 흥겨웠고, 잭 애프론과 젠다야는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영화 내내 들썩이던 발끝과 어깨를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관객이든 공연자든 ‘그 순간 웃고 즐기며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바넘이고 싶은걸까. 아니면 그 이면에 담긴 현실을 차갑게 바라보는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공연평론가’이고 싶은걸까. 이성적 사실로 감성적 감동을 부정할 수 있는걸까, 아니면 감성적 감동으로 이성적 사실을 외면해도 되는걸까. ‘선비질’의 시작과 끝은 대체 어디일까. 지금으로서는, 영화가 굳이 ‘바넘’이라는 이름을 고집 했어야 했을까하는 아쉬움만 진하다.


146년간 존속되던 바넘의 서커스는 동물 학대 논란과 줄어드는 관객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7년 5월 마지막 막을 내렸다. 이 뉴스를 화면에 띄운 내 맥북의 스피커에서는 'This is me'의 멋진 리듬이 흘러나온다. 이 아이러니를 사랑해야할지, 외면해야할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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