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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와 실력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by 김남훈 해설위원

<강도와 실력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처음엔 앞구르기였다. 신인 시절, 나는 엉성하게 매트 위를 구르다 말았다. 링 위에 올라갈 ‘짬밥’도 되지 못했다. 세월이 한참 느껴지는 헤지고 터진 매트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고, 중심을 잃고, 낙법이 아니라 그냥 쓰러짐에 가까운 무언가를 반복했다. 그때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구르라고 하니까 구르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것이 내게 있어 ‘강도’라는 개념이 처음 출현한 날이었다.


관장님은 곧잘 영어,일본어,한국어가 단어 별로 섞인 지시를 내게 내렸다. 그만큼의 나라에서 시합을 뛰었다는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선배들의 낙법 소리는 리듬을 타고 이어지는 타악기처럼 이어졌다. 팔을 펴라. 허리를 말아라. 머리를 들지 마라. 그 모든 말들이 내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내 몸은 매트에 다시 박히고 있었다. 운동이 끝나면 매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사 먹고, 가방 안의 땀 젖은 운동복이 식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향했다. 용인 모현의 체육관에서 서울 구로동 한켠의 원룸까지 가는 것은 그야말로 대장정이었다.


버스를 수차례 갈아타고 마지막에 이르러 전철 문이 열리고 닫히는 걸 볼때마다 내 정신도 함께 꺼졌다 켜지는 느낌이어싿. 엉덩이와 팔꿈치엔 퍼런 멍이 들었고, 가끔은 잘 때 팔이 저려 깼다. 하지만 그 모든 불편함은 실력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들어오기 위한 통과의례 같았다.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앞구르기가 가능해지자, 뒤구르기가 이어졌다. 매트는 종종 혈흔을 삼켰다. 어느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훈련은 기술이 아니라, 맷집을 만드는 일이었다. 맞는 데 익숙해지는 일. 맞고 나서도 멀쩡한 척하는 일. 그리고 결국, 그 강도를 견디는 내 몸이 하나의 무기가 되는 일. 복싱장에서도 역시 앞구르기와 비슷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잽을 막지 못하고 얼굴이 돌아갈 때, 주먹이 늦게 나가고 상대의 턱만 허공에 맴돌 때. 그리고 그 모든 실패들이 나를 다시 매트 위에 세워주고 있었다.


그건 라이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시속 40km가 빠르다고 느껴졌다. 헬멧을 쓰고 거리를 달릴 때, 바람은 나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쥐어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익숙해지니 그 바람은 나를 앞쪽으로 밀어주는 듯했다. 점점 속도가 오르면서, 주행풍은 강해졌고, 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도로에서 혼자 귓속을 때리는 바람소리는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 강도는 감당할 수 있겠냐?” 나의 대답은 늘 같았다. “할 수는 없지만, 해보겠다.” 작년 봄, 전남 고흥의 김일체육관을 다녀왔다.


그곳은 나에게 성지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던, 피와 구토와 환호가 한데 섞인 성지. 어쩌면 사각의 링으로 만들어진 자궁으로 나를 낳았던 곳일 수도 있다. 김일체육관을 떠나, 나는 복귀 루트로 서해안을 택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도로 위에서, 나는 마치 러시아 문학속 등장인물처럼 느껴졌다. 이유 없는 죄를 짊어진 죄인처럼, 고독과 숙명 같은 것들이 내 어깨에 앉아 있었다. 도로는 바람과 함께 나를 시험했다. 바람은 앞에서 불기도 했고, 옆에서 때리기도 했다. 가끔은 등 뒤에서 툭툭 밀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버티는 일이었다. 전남에서 충남으로 접어드는 지점에선 거센 비가 쏟아졌다.


비는 바람과 손을 잡고 나를 길 밖으로 밀어냈다. 시야는 흐려졌고, 타이어는 물 위를 미끄러졌다. 나도 그렇게 삶의 강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닭가슴살 핫바와 캔커피를 들이켰다.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 맞나?” 하지만 곧 답이 돌아왔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야.” 인생도 마찬가지다.


꿈을 향해 나아갈수록 시련은 커진다. 속도가 붙을수록 마찰도 커지고, 더 멀리 가기 위해선 더 많은 걸 잃는다. 하지만 그건 정상이 아니다. 그건 과정이다. 정상은 언제나 환상이고, 고통은 늘 실체다. 고통의 강도가 올라가는 건, 내가 실력의 다음 계단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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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가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건 내 의지가 아닌 경우도 많지만, 그것을 견디는 능력은 확실히 내 것이다. 바람은 계속 불 것이고, 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길을 걷는 한, 나는 계속 강해지고 있다. 삶은 늘 시험처럼 찾아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친다. 링 위에서든, 도로 위에서든, 아니면 인간관계 속에서든. 내가 맞이하는 모든 강도는 결국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기 위한 1:1 훈련 같았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견딜 수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누군가는 내게 등을 돌릴지라도. 나는 여전히 직진하고 있다. 강도가 올라갈수록, 나는 더 깊이 나아간다. 실력은 그렇게 완성된다


- 인간어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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