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레슬러. 콘텐츠 내에서 악역에겐 주어진 의무가 있다. 극의 절정 부분에서 최대한 강렬하고 잔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 그래서 모든 스폿라이트를 선역에게 쥐어주는 것. 프로레슬링도 어떤 부분에선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래서 그 캐릭터를 깨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 나에게 그런 기믹을 깨는 두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한 번은 지켰고 한 번은 어기고 말았다.
9년 전. 홍대에서 우연히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만났고 간청 끝에 그의 노래 '피가 모자라'를 일본 시합 입장곡으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된 작별도 하지 못한 채 난 일본에 도착했고 그를 추모하는 마음에 그의 본명 이니셜이 들어간 암 밴드를 만들었다. 하지만 백스테이지에서 입장 직전에 풀어버리고 말았다. 난 악역이면서도 코믹한 반칙을 종종 쓰는 캐릭터를 갖고 있다. '전 한국에서 온 잘생긴 레슬러 김남훈입니다'라는 멘트를 인사말처럼 쓰는 캐릭터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가 요절한 지인의 암밴드를 하고 나오면 이런 정보를 접한 관객들이 웃을 수 있을까. 달빛요정님이 자신의 노래를 쓰라고 허락했던 것은 (그도 프로레슬링 팬이었다)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더 그 역할에 본분에 충실히 하라는 의미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이 상황 속에서 나의 본분은 무엇일까. 내 개인적 슬픔과 애도를, 지금 여기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1년 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가졌다. 5월 흥겨운 축제의 부대행사였는데 마침 링이 쳐진 곳이 전일빌딩 앞이었다. 전일빌딩이 어떤 곳인가. 5.18 때 진압군이 어떤 폭거를 자행했는지 그 증거들이 모두 남아있는 곳 아닌가. 이 건물에서 발견된 탄흔은 10층에서만 177개에 달하며 3, 8, 9, 10층 외벽에서도 최소 55개의 탄흔이 발견된 곳이다. 봄날의 향기가 가득한 이곳은 1980년 5월엔 피 냄새가 가득했을 것이다. 경기는 내 캐릭터대로 잘 끝났고 마무리 마이크웍을 하고 내려가면 되는데 계속 눈 앞에 전일빌딩이 어른거렸다. 이때 내 프로레슬러 캐리어 처음으로 기믹을 깨는 발언을 한다.
"전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로 제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5월 이곳에서 여러분들 앞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투표하고 제가 원하는 곳에서 시합을 하며 자유를 누리는 것.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1980년 지금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들과 그리고 그런 대단한 분들을 고향 선배로 두신 이곳 분들에게 감사인사드립니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긴 그럴 것이다. 방금 전까지 국부 공격, 눈 찌르기 같은 반칙 공격을 일삼고 힘이 부친다 싶으면 링 밖으로 도망가는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던 이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이래서 자기 캐릭터가 중요한 법. 아무튼 난 이렇게 내 캐릭터의 선을 처음으로 넘고 말았다.
5월이다. 5월 18일이다.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반대로 불의에 항거하는 엄청한 힘을 확인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심지어 5.18을 부정하자는 자들까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곱씹게 되는 날이다.
다시 한번 그분들에게 존경을 그리고 그 가족분들에겐 위로를
전합니다.
- 악역 프로레슬러 김남훈 -
추신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님의 이니셜이 들어간 암밴드는 이후 아직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