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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Aug 09. 2017

흔히 있는 일이다

1%의 가능성

최근 새롭게 시작한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서 남부순환로를 사이에 두고 우면산과 마주 보고 있는 불교 TV에 도착했다. 바이크를 타고 갔기에 인근에 세워두고 시간이 좀 남아서 다시 예술의 전당 쪽으로 약 1킬로 미터를 걸어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꺼내 작가가 보내준 원고를 검토하고 새로 산 북유럽 신화 관련 책을 읽다가 집합시간을 살짝 넘겼다는 깨달았다. 토르의 망치 뮬니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가 막 시작하려는 찰나 아쉽지만 페이지를 덮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남부순환로. 왼편에는 우면산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있고 오른편에 빌라들이 있는 곳. 특이하게도 대로는 물론 골목길 안쪽에도 카페, 편의점 같은 상점이 거의 없기에 오후 시간대에 도보로 이동하는 이들은 적은 곳이기도 하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나와 같은 동선을 택한 중년의 지긋한 아주머니가 나를 계속 힐끔거리며 내 앞을 걷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아주머니 지금은 그야말로 백주대낮 한강 이남 남부순환로이고 평균치를 상회하는 덩치에 분홍색 바이크 재킷에 노랑머리라는 극단적으로 시인성이 뛰어난 상태로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 없어요!"라고 속으로 소리쳤지만 내 마음속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아니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인상을 구긴 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쫓아오는정체불명의 거한을 가해 용의자로 미리 상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일 게 분명했다. 난 햇빛 때문에 살짝 인상을 구기고 있었던 것뿐인데.


목적지인 불교 TV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마지막 삼거리에서 아주머니는 승부수를 던졌다.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직전 몸을 우측으로 급히 빼면서 바로 담장 음영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톰 하디가 조종하던 스플릿 파이어 전투기의 기동처럼 민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주머니 본인은 나를 뒤에서 감시하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며 만약 내가 뒤돌아서서 위협을 가한다거나 하면 적극적인 대처를 하겠다는 심산 같았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차라리 반가운 일, 난 오히려 약간 속도를 높인 상태에서 이제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한 불교 TV 안으로 쏙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점차 목적지가 가까워질 무렵 버스 정류장 옆에 세워둔 바이크 트렁크 안에 있는 캔버스화가 생각났다. 오늘 녹화 때 입을 파란색 바지, 분홍 셔츠, 노랑 보타이에 걸맞은 갈색 캔버스화였다. 뚜껑을 열어 캔버스화를 꺼냈다. 300미리짜리 귀한 신발이다. 이걸 손에 들고 방송국으로 가기 위해서 몸을 돌리는 순간 난 이미 지나갔으리라 생각했던 아주머니와 길에서 맞닥뜨리고 말았다. 아주머니의 얼굴 표정엔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폭발하듯 올라간 심박수가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들리는듯했다. 아마 아주머니 시점에선 어떤 노랑머리 거한이 버스정류장 뒤편에 숨었다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일부러 '급습'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논리적인 판단의 결과 디스토피아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등장인물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총총걸음으로 불교 TV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바로 다시 이동을 한 듯했다. 그분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내가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공포의 냄새가 났다는 것은 분명 안다. 나도 그 냄새를 안다. 대형 트레일러트럭이 우회전 궤도를 만들기 위해서 직진하고 있던 내 쪽으로 달려올 때, 헬멧 안으로 공포의 냄새가 가득하고 실드를 연 채 한참을 달려도 빠지지 않는다. 해외에서 레슬링 시합을 끝내고 좁고 좁은 염가형 호텔에 누워 있을 때 아까 맞았던 가슴 쪽에서 강한 흉통이 올라오면서 방안 가득 매캐하게 공포의 냄새가 차오른다. 창문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고 간신히 창문 손잡이를 잡아도 몇 센티밖에 열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은 종. 종. 있는 일이다. 다만 어두운 골목길이나 주차장 또는 건물 비상구 계단이 아니라 백주대낮이었다는 것이 이례적이고 황당할 뿐이다.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인지된 내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공포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내가 아주머니를 상대로 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0%다.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머니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단 1%의 가능성. 그것이 공포를 만든다.

난 그저 기분이 좀 나빴을 뿐이지만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것과 범죄의 공포는 비교할 가치 조차 없다. 


거의 매일같이 여성이 죽는다. 남성이 살해를 한다. 칼로 찌르고 독약을 타고 물에 빠뜨린다. 모르는 사람인데 죽이고 가족이라고 죽인다. 부인을 죽이고 여자 친구를 죽인다. 


난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의 두려움을 모른다. 버스 막차에 나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을 모른다. 홍대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택시를 잡아타 목적지를 말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린다. 너무 편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한국사람이 있다. '여성'이라는 한국사람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고 가해자는 '남성'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기분 나쁨의 근원은 아주머니가 아니라 '나쁜 남성'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옳지 않고 온당치 못하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축에 속하는 이들이 차별받고 억압받고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있어선 안될 일이다. 적어도 문명사회라면 이래선 안된다.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고 언론에선 가십으로 소비해버리고 마는 것일까. 녹화를 끝내고 헬멧을 쓰고 아까 아주머니와 대면했던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언제쯤이면 1%의 가능성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이건 분명 아닌 거 같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국립 현충원을 지나 노들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일그러진 표정 자체는 생생하게 떠올랐고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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