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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May 05. 2020

태국어 시작

나도작가다공모전


도서관에 가면 나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난 9시보다 10분 일찍 도착해 백팩을 메고 있는 많은 학생들과 함께 도서관 문 열리기를 기다려 뛰어 올라간다. 그 애들이 뛰니까 나도 덩달아 뛰는 거다. 그 옛날 중학교 때 사직 도서관 앞에 한참 줄을 서있다 드디어 문이 열리면 선배들 따라 후다닥 뛰어들어가듯이 이젠 한참 어린 학생들과 뛰어간다. 세월은 그렇게 어린 꼬맹이를 하하 대빵 어른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의 자리는 제2외국어가 몰려있는 책장 옆이다. 내가 그곳을 택한 이유는 전화 부츠와 화장실이 가까이 있고 너른 도서관을 향해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갑갑하지 않은 통로 쪽 끝자리인데 학생들은 주로 창가를 택하기에 그리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하하 그래도 행여 그 자리를 뺏길까 나도 애들 따라 열심히 뛴다.


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쫘악 외국어 서적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거기 태국어. 말만 들어도 설레는 태국어가 있다. 사십여 년 전 문을 콱 닫아버린 나의 태국어. "영어를 잘해야지 태국어는 무슨!" 그렇게 나는 태국어를 괄시했다. 사십여 년 전 나는 한국외국어대학 태국어과 학생이었다. 우리 과 학생은 도무지 20명. 서교동 살면서 아침마다 그 많은 신촌의 대학들을 두루두루 거쳐 멀고도 먼 이문동 골짜기로 가는 게 참 싫었다. 대학이기엔 너무도 볼품없이 작았던 이문동 캠퍼스. 특히 우리 과는 지방 학생들이 가득했다. 경상도에서 온 많은 친구들은 태국어의 기본 인사 '싸왓디 크랍'을 할 때마다 애를 먹었으니 교수님께서 아무리 '싸'로 발음하라 해도 '사'라고 해서 몇 안 되는 서울내기 여학생들을 까르르 배꼽 잡고 웃게 만들었다. 재수 삼수 사수 아저씨 같은 학생들로 가득했던 곳. 거쳐가는 곳쯤이었을까. 생뚱맞은 태국어 전공. 영어를 부전공으로 하며 내내 영어에만 집중한 세월들. 그러면서 까맣게 잊힌 태국어. "무얼 전공했나요?"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으니 조금이라도 배운 게 남아있어야 전공이라 말하지. 하이고.


태국에 여행을 가도 행여 사람들이 내가 태국어 전공임을 알아볼까 봐 쉬쉬. 태국어를 읽어볼 엄두조차 내지 않던 날들. 그렇게 태국어 전공 아닌 척 태국어는 전혀 상관없는 듯 생활해 왔다. 그런데 작년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 감사하다는 현지어 '떼리마 까시' 한마디만 외쳐도 그들은 다시 돌아보며 좋아했다. 단 한마디로도 그러한데 조금이나마 알아듣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슬금슬금 태국어에 생각이 미친다. 동남아 여행을 자주 가는데 생판 모르는 말레이시아어 감사합니다 하나로도 그러하거늘 내가 태국어 전공인데!


그래서 난 태국어 앞에 섰다. 익숙한 이름들이 즐비하다. 그 옛날 함께 공부하던 과 친구 또는 선배다. 흐르는 세월 속에 그들은 교수가 되어 책을 지은이로 이름도 선명하다. 몇 안 되는 학생들로 툭하면 미네르바 동산으로 야외수업을 나가 꺼까이 커카이 싸왓디 카 컵쿤 카를 외쳐대던 그때 그 시절. 아, 그땐 학점도 잘 받고 통역도 하고 꽤 잘했었는데 이젠 꺼까이 자음 한 개 쓰기가 힘들구나. 어떻게 썼더라? 그래. 제대로 옛날 기억을 되살려 보자. 집에 오자마자 책장을 뒤져 구석에 처박아둔 옛날 학교 다닐 때 공부하던 책을 꺼낸다. 공책도 있다. 와우. 버리지 못하는 나의 단점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우아.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네?


그렇게 난 태국어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금년 초 태국에 갔을 때 용감하게 태국말했고 그 반응은 대단했다. 많은 캐디들이 쑥덕이는 게 들렸다. 태국어 잘한다고. 하하 짧은 태국어 실력이지만 그래도 현지어라고 캐디들을 통해 싱싱한 두리안을 싸게 사기도 했다. 골프를 하면서 많은 시간 곁에 있는 캐디에게 나의 발음을 시정 받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한국어 단어들을 알려줬다. 하하 그야말로 주거니 받거니이다. 늦었다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작하길 얼마나 잘했는가. 난 계속 태국을 갈 것이고 그때마다 한층 레벌 업된 태국어를 구사할 것이다. 태국어! 본격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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