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배화여자중학교 동창이다. 1970년 3월에 입학하여 1973년 2월에 졸업했다. 중학교 입시과외를 받다 5학년 어느 날 그 모든 과외가 중단되었다. 입시가 뺑뺑이로 바뀐 것이다. 그 뺑뺑이로 배화여중에 온 친구들이다. 뒷 산에 올라가하던 문학반 수업. 육영수 여사가 지어주신 커다란 강당 아래 음악실에서 토스카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감동으로 듣던 음악 수업. 소설책도 읽고 시험공부도 하던 본관의 고풍스러운 도서관. 학교가 너무 꼭대기에 있어 다리통이 굵어졌다는 불만까지 그 모든 추억을 함께 하는 친구 열두 명이다.
2009년에 누군가 배화여중 모여라~ 에 모이기 시작해 12명에서 딱 대문을 걸어 잠근다. 이제부턴 우리만의 우정을 다지기야~ 툭하면 남대문 시장 회현상가에 자리 잡고 있는 연재네 가게에 모여 이것저것 물건도 사고 깔깔 푸하하하 중학교 교실에서처럼 웃음보를 터뜨린다. 무얼 이야기했는지 끝나면 하나도 모르겠는 완벽한 수다. 코로나 때문에 뜸하다 3년 만에 모인다.
강릉의 유정이와 울산의 나는 서울역에서 만나 고가 차도를 걸어 약속장소 A호텔 뷔페식당으로 간다. 제주의 용순이는 갑자기 불어닥친 눈으로 비행기표를 못 구해 빠진다. 추위를 걱정해 온통 싸매고 왔지만 따스한 해님 덕분에 추위는커녕 장갑도 머플러도 벗어대고 있다. 룰루랄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간다. 인천에서 평촌에서 일산에서 광명에서 동탄에서 강남에서 온다. 오호호호 얼마 만이야. 한바탕 인사가 나누어진다. 지방녀들 이리 와! 가운데로 우리의 자리가 마련된다. 거기엔 바로 전날 발이 부러져 깁스했어. 모임 참석 못해~ 하는 통에 우리 모두가 아쉬워한 미리가 발에 기브스를 한 채 나와 있다. 하하 그 발로 어떻게!!! 택시 타고 달려왔지! 잘했어. 잘했어. 정말 잘했어. 못 보는 줄 알았잖아. 아 좋다 좋아.
나 중학교 2학년 때야. 엄마가 돌아가셨지. 그래. 기억나. 그때 담임이 연대 국문과 나온 김은영 선생님이셨지. 너 눈이 퉁퉁 부어 교실에 들어오던 거 생각 나. 아이들은 그때 추억을 쏟아내고 세상이 쥐 죽은 듯 우리 모두는 유정이의 기막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난 어느 정도 컸으니까 이모들이 맡아주셨어. 그러나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남동생은 이모들이 거두기가 힘들었나 봐. 그래서 그 동네. 잘 아는 집에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가게 되지. 항상 마음속엔 있었지만 그 집에도 나이 많은 누나가 있고 내가 자꾸 연락하면 안 될 것 같아 난 스스로 연락을 끊었지. 그러나 항상 마음 한편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컸어. 아쉬움에 사십여 년 세월이 흘러가도록 앨범은 이사해도 꼭 챙겼어. 그런데 말이야.
2019년! 땅거미 내려앉는 어스름 어느 날 저녁 문득 전화가 걸려온 거야. L.Y.H. 를 아냐고. 아, 내가 그 이름을 어떻게 잊겠어. 동생은 양자로 그 집에 들어갔으니 호적도 정리되어 성도 바뀐 상태였지만 난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지. 배화여중 다니던 유정님이 맞으시면 동생이 애타게 찾고 있으니 전화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명함과 전화번호가 전달되었어. 쿵! 쿵! 쿵쿵! 심장이 두들겨대고 난리였지만 당장 전화를 할 수는 없었어. 꽁꽁 비밀이었기에 일단 남편에게 말을 해야 했으니까. 그날 밤을 그렇게 뜬 눈으로 새우고 다음 날 주차장 멀찌감치 조용한 곳에 차를 대고 드디어 전화를 걸었어. 동생! 꿈에도 그리던 바로 그 동생! 누나~ 얼마나 찾았는데! 누나 아아~
배화여중 하나만 기억했던 남동생은 그러나 누나가 1957년 생이 아니라 1958년생의 빠른 생일인 걸 몰랐고 집에서 부르던 이름과 호적이름의 끝자가 살짝 달라 아무리 정보력을 동원해도 끝내 찾을 수가 없었대. 어떡하다 배화여중 관계자를 만나게 되어 그때 당시 배화여중생 모두를 뒤진 결과 드디어 사진을 보고 우리 누나! 찾아낼 수 있었다니. 아흑. 그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그랬구나. 몰랐어.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너는 공부도 잘하고 맨날 반장하고 그랬잖아. 아주 씩씩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그랬구나. 얼마나 힘들었어. 눈물 콧물 울음바다가 된다.
오잉? 누가? 응 동생이 누나 친구들 대접한다고 어느새 와서 우리 식사비 지불하고 갔어. 뭐라? 아니 그냥 가게 하면 어떡해. 우리가 인사하게 해야지! 동료들이 있대. 이곳 지나는 길에 누나 있다니까 살짝 들러 식사값만 지불하고 빨리 간 거야. 세상에 이 많은 식비를! 유정이의 그 특별한 동생 볼 기회를 놓친 우리는 그럴 수 있냐고 막 그녀를 다그친다.
밥을 다 먹은 우리는 회현상가에 있는 연재의 가게로 걸어간다. 그 좁은 곳에 우리들 실컷 수다 떨라고 이미 연재의 서방님께서 옹기종기 의자를 배치해 놓으셨다. 감사합니다~ 서방님들이 더 적극적인 우리들의 모임이다. 기정이가 핸드크림 두 개씩을 모두에게 안겨주자 혜경이가 자기 남편이 거북선을 만든 체암 나대용 장군의 후손이라며 드립커피 열봉이 들어있는 박스를 둘린다. 오호 고뤠? 시끌벅적 감탄하는 중 은석이가 슬그머니 나가 신세계로 가서 즉석에서 짜주는 고급 오렌지 주스를 사 한 통씩 돌린다.
연재는 정신없이 자기 집의 물건을 우리에게 퍼주는데 커다란 스카프를 맘대로 고르게 하더니 덧버선 두 개, 손수건, 헤라 비누. 또 줄 거 없나? 애들은 아서라 아서. 그냥 집어넣어. 그러나 연재는 계속 퍼준다. 하하 네 살 손주 있는 사람~ 방탄 장갑이. 세 살 손녀 있는 사람~ 예쁜 타이즈가. 이번엔 애기들 그릇~ 손주 있는 친구들 모두 손들어. 난 손주가 없어 제외된다.
연재네 집에는 없는 게 없다. 반지 귀걸이 목걸이 팔찌 옷 가방 온갖 생활용품 주방용품 한 아이가 이거 좋다 하면 나도 나도~ 그 자리에서 구매가 이루어지며 수다에 물건 고르기에 깔깔 웃음보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푸하하하 어디서 이렇게 실컷 웃어볼까? 넌 이 색깔이 더 어울려. 그건 너무 작아. 한 아이가 무얼 입거나 걸치면 여기저기서 평가가 쏟아진다. 그런가? 이거 하지 마? 그래 그건 아니야. 저거 해. 푸하하하.
슬슬 배가 고파지니 어느새 혜경이는 바로 옆의 신세계로 달려가 팥시루떡과 흑임자 인절미를 사 온다. 연재는 부스럭부스럭 커다란 사과를 꺼내놓고 정순이가 나 손 닦았어~ 사과를 깎는다. 연재네 집엔 먹을 것도 많다. 땅콩도 꺼내놓고 서방님이 까준 국산 호두라며 한 움큼 내놓는다. 배불러~ 하면서도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윤미랑 정순이랑 안쪽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 찬 물 주문 대로 뽑아 대령한다.
미형이가 지방녀에게 특별 선물이라며 유정이랑 나에게 예쁜 머리핀을 하나씩 사서 준다. 이제 정년퇴임을 하는 박사 윤미는 새로 박사를 딴 유정이에게 특별 선물이라며 캐시미어 스카프를 선물한다. 연재네 물건 중에 적당한 걸 골라 서로서로 즉석 선물교환이다. 하하하 깔깔 정신없이 웃음보는 터져 나온다. 정순이는 문 앞에서 닫았다 열었다 오가는 사람이 적을 땐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오가는 사람이 많을 땐 시끄러울까 문을 닫는다.
유정이가 박사 된 턱으로 턱받이 손수건을 우리 모두에게 사준다. 연재는 이 모든 걸 넣어갈 작은 주머니 가방을 또 하나씩 준다. 난 시원하게 잘 닦아지는 목욕타월을 사서 하나씩 나누어 준다. 희숙이가 끝으로 신세계에 가서 즉석에서 싸주길 기다려 아주 신선하고도 맛있는 김밥을 사 온다. 점심도 두둑이 먹었는데 무슨 식당엘 가냐. 그냥 여기서 고우고우. 그 작은 가게에 십여 명이 옹기종기 김밥을 먹고 신세계 스타벅스에서 쿠폰 있는 친구들의 커피가 배달된다. 오호호호 먹을 것도 많고 선물도 많고 이야기도 풍성.
뭐? 벌써 시간이 그렇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당일치기로 올라온 지방녀들이 서울역으로 간다. 삼 년의 수다를 몽땅 털어놓은 듯해. 그래~ 그런데 우리 무슨 이야길 했지? 하하 그게 바로 수다라는 거야. 푸하하하 친구. 우리는 무려 오십여 년 전 추억을 함께 하는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