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의 악몽

by 꽃뜰


나의 특별한 친구 4명 아르헨티나의 고기 잘 굽는 아이, 시애틀의 사진 잘 찍는 아이, 서울의 산 잘 타는 아이,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 그 애들에게 글 써보라고 불 질러 낚여 온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 댓글이 달리는 거며 조회수가 늘어나는 것하며를 매우 신기해하더니 그에 힘입어 오늘 제2탄을 카톡에 올려왔다. 그리하여 그애가 올린 그대로 여기 또 올려본다. 제목은 '블루스의 악몽'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대학에는 입학하지 않았던 1976년 1월쯤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대입은 통과했던 때라 만사 아무 걱정할 거 없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 당시 스포츠가리에 검정 교복을 탈출하고 초짜 어른 티 내고 싶어 어설픈 사복에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뻐끔담배 피워가며 친구들과 하릴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허허 다방이라는 곳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탁 치길래 돌아보니 웬 장발에 세련된 가다마이를 걸치고 금테 안경을 쓴 형뻘 되는 사람이라 졸아서 누군가 하고 자세히 보니 친구 녀석이 가발에 형 양복을 입고 깔깔 웃고 있었다. 놀라 한참 같이 웃다가 이차림은 뭐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우리 고고 나이트클럽이라는데 가보자고 바람을 잡았다.


난 비교적 순박하고 그다지 용기가 없는 타입에다가 이제 머리도 스포츠가리에서 쪼금 더 긴 상태였고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라 머뭇거렸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일어나고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에 그 친구의 이끌림에 쫒아가기로 했다. 난생처음 가본 곳은 옛날 대연각호텔 지하 해피타운이라는 나이트클럽이었다. 꽝꽝 울리는 그룹사운드 소리와 휘황찬란한 조명. 90도 인사하는 형뻘의 웨이터들. 스테이지에서 열정적으로 흔들어대는 선남선녀들. 빠짝 주눅이 든 나에게 그곳은 바로 '신세계'였다. 그 당시는 디스코가 나오기도 전인 고고 리듬이 유행할 때였는데 대강 고고 타임이 끝나면 블루스 음악이 나오던 '꼬불꼬불' 시대였다.


정신 차리고 분위기를 살펴보니 고고춤을 추는 건 많이 봐왔지만 남녀가 같이 안고추는 블루스 추는 걸 보니 너무 멋있게 보여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데 내 친구 범승이는 벌써 스테이지에서 네댓 살은 위일 거 같은 세련된 여자와 멋지게 블루스를 추고 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주눅 들어 자리만 지키다가 후일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장한 다짐을 했다. '꼭 블루스를 배워 본때를 보이겠노라!!'


재수라도 해서 명문대를 가고자 하는 다짐이 아니라 블루스를 배우겠다는 다짐을 한 게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그때는 결연한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며칠 후 멋쟁이였고 낭만파셨던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한참 동안 껄껄 웃으시더니 베개와 레코드판 한 장을 갖고 오라고 하신다. 그러더니 베개를 살포시 오른손으로 안고 머리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놓으라 신다. 절대 머리에서 판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신다. 그래야 자세가 바르게 된다면서 스텝을 가르쳐주신다. 박자에 맞추어 종횡으로만 움직이고 사선으로 나가지 말고 턴할 때는 거의 직각으로 돌라는 등의 블루스의 기본을 전수받는다.


암튼 기본을 전수받고 혼자 베개를 안고 연습에 연습을 거쳐 어느 정도는 된듯해 드디어 D-day를 잡았다. 네 명의 친구를 모아 그 당시 제일 물이 좋다는 팽고팽고로 출격하였다. 머리도 조금 길어졌고 갈색 콤비에 구두도 광내고 향 좋은 로션도 듬뿍 바르고 완전무장한 채로. 드디어 입장해 목 좋은 자리를 잡고 레이더를 온통 스테이지에 모으다가 드디어 나섰다.


친구들과 설렁설렁 고고춤을 추다가 블루스로 바뀌는 순간 조명이 어두워졌지만 들어가는 많은 여자들 중 긴 생머리의 뒷모습이 그럴듯한 여자의 손목을 살짝 잡고 당겼다. 근데 아뿔싸!! 그날따라 주말인지라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는데 내가 잡은 손이 다른 손이었던 것이었다. 왠지 날씬한 뒷모습에 비해 두툼하다 생각했는데 돌아보는 여자는 퍽이나 넉넉한 딴 여자였다. 아마 오늘 입장했던 여자 중 젤 펑퍼짐한 듯.


순간 잽싸게 손을 놓으려 했으나 오히려 그 뚱녀는 깍지까지 끼고 꽉 잡은 채로 스테이지로 몰고 가는 것이다. 도살장 가는 소처럼 끌려 가 왼손으로 족발 잡고 오른손으로 흘러내리는 삼겹살을 받치면서 스텝이고 레코드판이고 뭐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진 십여분을 마치고 비지땀 범벅이 되어 자리로 돌아오니 오른쪽 볼때기와 콤비 마이 어깨 부분이 하얀 파운데이션으로 도배되어있다. 에휴.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놀리고.


암튼 그렇게나 기대했던 나의 첫 블루스의 꿈은 하느님이 주신 시련으로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이제 세월이 40여 년이 흘렀으니 그때 그 여자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60 중반을 넘겼을 텐데 부디 다이어트에 성공해 행복하게 살아왔길 바라본다.


https://youtu.be/8LhkyyCvU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