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남편과 그 옛날 직장에서 호흡이 척척 맞던
그는 울산 토박이로 그야말로 의리의 사나이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가족 화목에 확고한 철학이 있는 남자. 나의 남편과 함께 손발이 척척 맞아 부서를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이끄는 데 한몫 크게 한다. 회사가 아니라 친지들의 모임처럼 많은 행사 때 여자들은 음식을 해왔고 온 가족이 뒤섞여 실컷 먹고 이야기하고 운동하고 그랬다. 새해가 밝으면 시산제라고 온갖 것을 싸들고 치술령이니 신불산이니를 다니며 그 모든 직원들이 산 꼭대기 평평한 곳을 찾아 상을 차리고 돌아가며 절을 하고 웃고 있는 삶은 소 대가리였던가 돼지 대가리였던가의 입에 돈을 꼽고 퇴주를 줄 서서 마시고 하하 추위 속에 벌벌 떨면서도 그런 행사를 깔깔 푸하하하 웃음 날리며 즐겁게들 치러냈다. 그렇게 남편과 콤비가 잘 맞던 그도 은퇴를 했다. 나의 남편도 은퇴를 했다. 모두 모두가 은퇴를 한다. 그런데 이 분은 좀 다르다. 진작부터 선친께서 물려주신 거대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는다며 이리저리 전국 사과농장뿐 아니라 일본으로 어디로 해외견학까지 하며 열심이더니 은퇴하고는 아예 농장으로 살림을 옮겨 콕 박혀 지내더니 결국 우리나라 최고 사과농장을 만든다. 왜 최고냐?
물 주는 것도 자동공법으로 설치해 순차적으로 빵빵 온 사과 밭에 나오게 만들고, 사과 나무와 사과 나무 사이 골에 풀을 심어 그것을 질소 비료로 활용하고, 항상 신품종을 도입해서 사과의 맛을 높이고,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도 나무가 쳐지지 않도록 일일이 나무를 쇳대로 지지해놓고, 해도해도 모자랄 그의 밭에만 있는 많은 특별한 방법때문이다. 그뿐인가? 노노노
갑자기 그가 나무에서 사과를 뚝 따더니 내게 준다. 앗, 닦아 먹어야 되잖아요. 지금 당장 먹어보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닦지 않고 어떻게 먹어요? 의문문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하 그가 웃는다. 그의 농장은 그게 특징이란다. 농약을 써도 아주 고급 농약을 써서 인체에 전혀 피해가 안 가는 것인데 그나마도 많이 쓰지 않으며 특히 사과들이 나무에 오래 매달려 있어 크고 달고 그리고 농약에서 안전하단다. 그의 농장에서 가져오는 사과는 그래서 껍질 채 먹는다. 아삭~ 오홋. 사과밭에서 그대로 따서 한 입 깨물으니 아, 살살 흐르는 단물하며 아삭 그 싱싱함하며 호홋 순식간에 한 개를 다 먹어치운다. 끊임없이 공부하며 나름 확고한 철학으로 사과를 재배하는 의리의 사나이. 하하 항상 새로운 공법 새로운 품종을 연구하며 그걸 부지런히 실행하는 그의 농장은 최고가 될 수 밖에 없다.
서로 바빠 정말 오랜만에 찾은 우리에게 그는 자신이 새로 만든 농장을 보여주겠다며 서둘러 앞장선다. 이미 사과나무 가득한데 그는 한쪽 밭을 또 일구고 있었다. 금년 김장 때 쓸 배추를 지금은 심지만 그것 캐내고 나면 또 다른 사과나무 밭을 만들 거란다. 그러면서 기존의 사과밭도 어마어마한데 우리가 안온 새 만들어 놓은 새로운 사과밭을 보여주겠단다. 그가 운전하는 전동 카트를 타고 다다다다 농장 꼭대기로 올라간다. 곳곳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아, 그는 자신의 왕국을 이 곳에 착착 건설해나가고 있다. 누구보다도 바쁘고 보람찬 은퇴생활같다. 가끔 이렇게 우리 같은 회사 사람을 만나 옛 추억을 나누면서 농장생활을 즐기는 듯하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이런 농장 모습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사과에 인삼을 먹여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종류의 사과나무를 심어도 보고 온갖 시도를 해본다. 새로 지은 사과밭을 자랑스레 보여주는데 우아.
기존의 사과밭도 대단한데 어마어마한 새로운 사과밭이 또 쫘악 펼쳐진다. 계획된 도시라고 할까? 연구하며 이렇게 저렇게 만들던 기존의 사과밭은 구도시라고 한다면 이 곳은 신도시라 해야 할까. 그의 그동안 사과밭에서의 경험과 경륜이 그대로 녹아든 그야말로 멋진 밭이다. 그 넓은 사과밭 사방팔방에 촘촘하게 쳐져있는 그물망. 저 높이 하늘을 향해서도 그물이 모두 쳐져 있다. 새들로부터의 방어막인가 보다. 이쪽 사과는 아직 파랗다. 익으면 황금사과가 된단다. 그야말로 황금 사과밭이다. 한 그루 한 그루 자식 돌보듯 사랑을 듬뿍듬뿍 주고 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의 정성과 사랑으로 무럭무럭 크는 나무들.
모든 나무에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입니다
쭉쭉 뻗은 사과나무 길 시작 부분에 어김없이 설치되어있는 회색 파이프 장치를 보여주며 그가 자랑한다. 아, 다만 몇 개월 못 봤을 뿐인데 그는 이렇게 멋진 사과밭을 또 만들어놓고 있었다. 기존의 사과밭을 경험 삼아 새로운 방식으로 철저히 계획적으로 만들어놓은 사과밭. 둥근달이 훤히 뜬 달밤에 아내와 함께 써치라이트를 머리에 달고 일일이 사과나무 꽃 수정을 시켜주었다던가 꽃을 잘라냈다든가 하하 기술적인 것은 들어도 이렇게 잊어버리는 나는 그저 달밤에 아내와 밤새도록~ 요런 단어만 와서 꽂힌다. 그렇게 정성으로 돌본 사과나무 밭이란다. 생각해보라 너무 운치 있지 아니한가. 한밤중에 탄광 맨처럼 머리에 작은 등을 달고 일일이 사과나무를 만지는 노부부의 모습이라니 하하. 어떤 일을 한 건지는 들어도 모르겠고 그저 달밤에 부부가 사과밭에서 하하
그들의 청춘과 거의 온 일생을 바쳐 일해 온 회사. 지금은 모두 은퇴했지만 그 옛날 자신들의 몸과 마음 바쳐 일한 곳에 대한 추억은 이렇게 상사와 부하직원으로서의 관계를 오래도록 가져가게 한다. 그 옛날 그 잘 맞는 호흡으로 부서 사람들에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때가 좋았어요 그때가 그리워요를 남발하게 만드는 직장동료. 거대한 사과밭을 거닐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뒤에 따라가며 그들의 인생처럼 황혼에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 둘의 모습을 감동으로 찰칵 그렇게 세월은 가고 있다.
그의 기존의 사과밭엔 이미 새빨간 사과가 주렁주렁이다. 시나노 스위트, 알프스 오토매, 부사, 신홍로... 종류도 가지가지다. 아, 어느새 해님이 저 멀리 산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휘영청 밝은 둥근 달님이 등장한다. 사방이 캄캄하다. 그와 그의 아내, 나와 나의 남편이 함께 맛난 한우를 숯불에 구워 먹는 것으로 우리의 특별한 하루가 마무리된다. 술을 잘 못하는 나의 남편과 그의 아내. 술 잘하는 친정아버지 피를 받아 어느 정도 술을 마실 수 있는 나랑 술을 참 잘하는 그가 쨍그랑 쨍그랑 술잔을 부딪히며 술 잘 못하는 파트너들 앞에서 소주를 마신다. 하하 그렇게 옛날 즐겁던 회사생활을 추억하며 밤이 깊어간다. 숯불에 굽는 차돌박이가 너무 맛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