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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Sep 21. 2019

은퇴한 남편

내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 주면 얼마나 좋을까

어젯밤 나빴던 기분은 오늘까지 이어지려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하지만 난 지금 정말 기분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 입이 일 미터나 쑥 나오려 하고 있다. 아무리 입가에 미소를 짓고 착한 나로 돌아가려 해도 나의 씸통이 단디 잡고 있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그 마음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냥 이대로 씸통난 채로 그에게 흥흥 흥체 피를 날리며 싸늘 모드로 갈까? 그럴까? 지금은 꼭 그러고 싶은 심정이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흥흥 흥체 피 쌀쌀 모드로 갈 것이냐 아니면 호호 호호호호 활짝 웃고 사랑을 가득 담은 행복의 웃음 모드로 갈 것이냐. 어찌 그를 대할 것인가. 그것이 지금 문제로다. 전자는 오늘 하루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예시가 있고 후자는 그냥 그렇게 웃다 보면 또 하루가 그렇게 행복하게 마무리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하지만 나는 지금 심하게 입이 툭 앞으로 튀어나왔고 비록 세탁기는 얼떨결에 지금 이 아침 돌리고 있지만 그야말로 손 딱 멈추고 까딱하기 싫은 그런 아침이다. 그에게 그렇게 아직 많이 섭섭하고 화가 난다는 소리다. 무슨 일이냐. 


아니 선배님, 어쩜 이렇게 무거워요? 

내가 화장실 간 새 내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후배들은 깜짝 놀란다. 무겁다고 난리들이다. 그 가방 안에는 나의 노트북이 들어있다. 웬 후배들이냐. 요즘 나는 여고 총동문회 홈페이지의 대대적 개편 사업에 차출되어 거의 매주 젊은 웹디자이너와 후배인 컴퓨터 업체 사장 그리고 총동문회 회장 총무 등 7명 정도와 함께 합숙 훈련하듯 엄청난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주 친해진 후배들이다. 그 후배들의 노트북은 세상에 내 거보다 더 큰데도 훨씬 가볍다. 그런 이야기를 파리에 있는 나의 아들과 남편과 늘 하는 삼자 대화 중에 슬쩍했더니 엄마가 그런데 관심이 많은 걸 아는 아들은 대뜸 "엄마 내가 최신형 노트북 사드릴게요." 하고는 착착 진행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여기 복병으로 등장한 나의 남편. "엄마 노트북 괜찮다. 글만 쓰는 건데 그런 거 필요 없다. 괜히 돈 낭비하지 말아라." 딱 일침을 놓은 게 아닌가. 헉!


그러나 생각해보니 사실 그런 것도 같다. 무거울 뿐이지 난 이 노트북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 2년 전인가? 집에서 데스크톱으로 할 뿐 도서관이고 교보문고고 오로지 핸드폰 달랑 들고 다니며 거기 코 박고 글을 쓰는 나를 딱하게 여긴 남편이 매장으로 데리고 가 노트북을 사주었다. 여기서도 모든 게 극과 극인 남편과 나는 잠시 갈등했다. 나는 기왕 사는 거 아주 최신형을 사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남편은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 없다는 주장이었다. 젊은이도 아니고 글만 쓰기 위함인데 굳이 비싼 최신형 필요 없다는 거다. 그 절충으로 진열된 꽤 괜찮은 상품을 아주 싸게 사는 꼼수를 택했다. 그래도 같은 가격대에서 또 경쟁이 붙었다. 적당한 가격대에 작고 가벼운 것이 있고 크고 무거운 것이 있었다. 그 차이는 그러니까 가격은 같은데 그 가격대에 가볍고 작은 것은 머리가 좋지 않았다. 크고 무거운 것은 대신 머리가 아주 좋았다. 머리냐 가벼움이냐. 거기서 난 당연히 머리를 택했다. 그래서 내 노트북은 머리는 좋지만 무겁다. 그래도 진열품이니 저렴한 가격에 샀고 거기 쾌감을 느끼는 나의 남편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가격 불문 이런 가전제품은 가장 최신형을 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핸드폰도 그렇다. 기왕이면 최신 것이어야지. 그만큼 기술개발을 한 것인데 그 수고료는 당연히 지불되어야지. 비쌀 수밖에 없지. 하는 생각이다. 그런 나를 나의 아들은 아주 잘 안다. 한 예를 들어볼까? 갤럭시 노트 8을 가지고 있던 나. 막 갤럭시 노트 9이 나왔을 때인데 모처럼 휴가를 받아 한국에 온 아들과 남편과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사진 찍고 어쩌고 하다 하이고 핸드폰을 딱 떨어트렸다. 농노에 작게 난 그러나 도로포장이 된 시멘트 길이었다. 헉. 놀라서 핸드폰을 들어보니 번개처럼 찌리릿 무언가가 잠깐 나왔다 할 뿐 깜깜무소식이다. 다행히 유리는 안 깨졌는데 온통 먹통이다. "엄마 이거 액정 나간 거예요. 이건 고치려도 돈 꽤 많이 들어요. 제가 노트 9 사드릴게요." 하면서 즉각 추르르르 검색을 통해 가장 괜찮은 값의 핸드폰 파는 곳을 알아내 당장 그리로 가자하며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남편 반대에 부닥쳐 꿈도 못 꾸고 있던 바로바로 그 갤노트9을 사안기 던 아이다. 그러니 엄마가 무거운 노트북으로 고생한다 소리를 듣고는 당장 최신형으로 사드리겠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주문을 넣는가 보다. 여하튼. 


그렇게 사주겠다는 애에게  도대체 왜! 나의 남편은 딴지를 거느냐 말이다. 막 진행하다가 그래도 아버지 말이 중요하고 또 아버지가 반대하는데 그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하여 그런 채로 우리의 대화는 멈췄던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혀 다음 날 공칠 때 난 나의 팀원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모두들 "장가가면 끝이야. 지금 혼자라 그런 것도 사주는 거야. 준다 할 때 얼른 받아. 점점 그런 일 없어져. 장가 가면 딱 끝이여." 하면서 다들 덥석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이 허락 안 해 지금 망설이고 있다 했더니 "아니, 당신이 돈 대는 것도 아니면서 왜 막아? 그게 왜 남편 허락이 필요한 일이야? 그냥 받아. 빨리 받아."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난 아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즉시 날린다. '엄마는 그게 꼭 갖고 싶다. 최신형 그거 사주라.' 그랬더니 '넵. 그럼 엄마가 아빠 잘 설득하세요. 주문합니다.' 해서 '그래 엄마는 깜놀 형태로 갈란다.' 해놓고 물건이 도착하면 모른 척 '앗 깜짝이야. 이게 웬일일까? 여보가 반대하니까 그냥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마 낫 이게 몬 일일까? 생각도 안 했는데 이게 웬일? 얘도 참. 왜 그랬을까? 호호 아유 좋아라. 어쨌든 와 너무 좋다. 우찌 이런 일이?' 요렇게 정말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리라 나름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빠 허락 없이 엄마랑 비밀로만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들은 영 찜찜했나 보다. 우리 가족은 본래 모든 일에 있어서 단체 합의를 이끌 어 낸 후에 실행을 하니 말이다. 한밤중에 그 애는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걱정이 많이 되는가 회사에서 말이다. 그러면서 화합을 하잖다. 아빠를 함께 설득해보잔다. 그래서 보이스톡을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3자 대화를 시작한다. "꼭 사주고 싶으면 내년 엄마 생일 때 사드려라." 그의 말에 내가 톡 쏜다. "세상에 그럴 거면 몇 달 앞당겨 지금 사지 왜 기다려서 사? 기왕 쓸 거 하루라도 빨리 좋은 걸 쓰지?" 그러나 그는 "엄마는 글 쓰는 것만 하는 건데 지금 것으로도 충분하다." 점잖게 아들에게 살 필요 없다 한다. 흥! "그런데 너무 무겁단 말이야. 정말 너무 무거워."나의 무거운 타령에 그는 다시 한마디. "그 무거운 거 조금만 참으면 되지. 괜히 아들이 그런데 돈 쓰게 하면 안 돼. 아들 돈도 아껴야지." 하면서 막무가내 반대다. 내참. 

 

갑자기 서러움이 목메어 올라온다. 흥. 내가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이걸 왜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아들은 지금 바쁜 회사 근무 중에 왜 저리 걱정하며 엄마 아빠 화합을 위해 애써야 하느냐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그는 왜 이렇게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들까? 아이고 정말 싫다. 아, 싫어. 이렇게 싫은 땐 어떡하지? 웃으면서 환하게 행복한 토요일을 만들려던 나의 꿈은 산산 조각날 조짐이 보인다. 아, 어떡하지? 이제 조금 있으면 그가 일어날 텐데 어떤 표정으로 맞을까? 난 계속 화가 났음으로 갈까.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닌 듯이 그냥 웃으며 명랑하게 하루를 시작할까? 그건 사실 종잇장 뒤집듯이기는 하다. 씸통으로 해결날 일은 아니다. 별 일도 아닌데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졌다며 도리어 아들은 매우 미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아빠가 허락 안 했는데 떡하니 노트북이 도착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항상 너그럽지 않다. 서로 자란 환경이 달라서일까?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그는 충청도 구석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물론 커서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어쨌든 그는 내가 어려서부터 과외공부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골 냇가에서 발가벗고 멱감던 아이다. 그래서일까. 그 어떤 기본 문제에 특히 돈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에게 맞춰 주려 애쓰지만 아, 정말 나는 힘들다. 왜 아들이 사주겠다는데 저렇게 한사코 말릴까? 아내가 무겁게 낑낑대며 짊어지고 서울을 다니는 게 아무렇지도 않단말인가. 아, 생각하니 괘씸해서 다시 입이 쑥 앞으로 나온다. 어떡할까. 그가 일어난 순간에 아무 일도 아닌 듯 웃으면 그냥 우리의 하루는 또 그렇게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뚱하니 입을 일 미터 내밀고 흥흥 흥체 피 싸늘함을 날리면 그도 지옥 나도 지옥 그렇게 지옥의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아, 어떻게 할까?


그래 결론은 나왔다. 그렇게 일 미터 쑥 내미는 입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큰 일도 아니다. 아들이 사주면 좋고 아니면 아닌 대로 내가 조금 무거운 거만 참으면 된다. 그래 오늘 하루를 그것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 그는 그렇게 절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낭비는 절대 않는다.'가 마치 그의 가장 중요한 생활 철학 같다. 그래서 난 아들에게 문자를 날린다. '아빠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냥 내년 엄마 생일에 최신형으로 사주면 되겠다.' 해놓고 나니 또 영 이건 아니다. 그래서 또 카톡을 날린다. '아니 그런데 무겁기는 정말 무거워.' 했다가 또 '아, 모르겠다. 무겁기는 하나 글 쓰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했다가 또 '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엄마 꺼가 지금 꼬지 기는 엄청 꼬지다.' 했다가... 하하 이미 프랑스 파리는 밤 12시를 훌쩍 넘어 쿨쿨 자고 있을 아들에게 하릴없이 이랬다 저랬다 카톡만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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