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성안동 커피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태풍 미탁을 앞두고 그 전초전이다. 밤부터 심해진다 하는데 이미 비가 많이 쏟아지고 여천천엔 들어가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비가 쏟아지면 제일 먼저 넘치는 것이 이 하천이기 때문에 비 소식이 오는 즉시 그 입구는 모두 철문이 꽝꽝 닫혀버린다.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겉으로 걸으면서 그 아래를 보니 내가 즐겨 걷던 그 도로에 물이 찰랑찰랑하다. 만약 철문이 열려있어 들어갔다면 꽤 위험했으리라. 어쨌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걷는 게 참 좋다. 그래서 나는 큼지막한 우산을 챙겨 들고 약속 장소에 걸어서 가기로 한다. 좀 점잖은 자리이긴 하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니까 바지를 입고 그리고 살짝 걷기 좋은 운동화를 신는다. 빼닥구두를 신고 정장 원피스를 입고 가려면 차를 가지고 가야 한다. 아, 그러나 이런 날 난 걷고 싶다. 식당이 그래도 약간은 편안한 곳이기에 밑에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들 일찍 가서 앉아있으면 보이지 않으리라. 하여 정장 원피스와 빼닥구두를 포기하고 쏟아지는 비를 핑계로 운동화를 신고 걷기 시작한다. 음하하하
다행히 오늘은 편안한 자리. 간장게장이 메뉴이니 이미 점잖은 자리는 아니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너무 점잖은 자리에서 어떻게 이 게장을 와그작와그작 발라먹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오래 모임이 거듭되며 서로 많이 편해지고 정이 들었다. 내가 감히 비를 핑계 대며 운동화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처음엔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리 자체도 항상 호텔이나 그런 곳에서 아주 점잖게 모이던 분들이다. 점잖게 아주 점잖게. 그런데 세월은 그런 모임도 이렇게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함께 나이 들어가면서 편안하게 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만나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것에 세월이 더해지며 아주 돈독한 그 무엇이 된다.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는 건 아니지만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점잖은 분들이 이젠 그런 일상의 대화도 즐긴다. 여하튼 난 일찍 가서 운동화 신고 왔음을 살짝 숨긴 채 점잖은 듯 한쪽 끝에 앉는다. 밑에는 바지라도 위에는 정장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옷이니까. 엣 헴. 점잖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아무리 편해져도 점잖은 자리이기에 꼿꼿하게 있다가 일단 모임이 끝나면 하하 우리 여자들끼리 꼭 애프터를 한다는 말이다. 점잖은 어르신네들 빼고 우리 여자끼리만. 하하 그런데 한 분이 꼭 가볼 곳이 있단다. 아는 분이 직장을 퇴직하게 되면서 오래 함께 근무한 분과 함께 커피숍을 차렸는데 매우 특이하다며 가자는 것이다. 오케이. 비도 하염없이 내리겠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고 우리끼리의 찐한 수다가 필요하던 차 우리는 그 직장인들이 퇴직하여 오픈했다는 커피숍을 향한다. 비는 계속 쏟아진다.
헉. 마치 일식집에서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셰프가 코앞에서 사각사각 썰어주는 회를 먹듯 그렇게 바리스타가 코 앞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주고 우리는 그 앞에서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받아 마신다. 오홋. "마치 일식집 같아요~" 커피 향 가득한 특별한 커피숍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것저것 물어본다. "커피난다. 이름이 특별해요. 직접 지으신 건가요? 두 분이 직장 동료라면서요. 회사 끝나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셨나요? 배우러 다니셨어요?" 하하 따다다다다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나의 질문. 아이 나도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 쏟아지는 질문에 차분하게 일일이 답해주는 두 남자. 향이 난다 처럼 커피 난다 커피 향 난다 모 그런 뜻이라는 것과 커피를 너무 좋아해 결국 배우게 되었다는 것 등등을.
커피 한 잔 내리는데 얼마나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와우 그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무슨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듯 앞에 있는 우리가 숙연해질 정도다. 와우. 온도를 재어가며 초를 다투어 시간을 재어가며 정확히 핸드드립의 커피를 만들고 있다. 나도 집중해 커피에 떨어지는 물을 바라본다. 풍겨 나는 고소한 커피 향과 함께 우리 네 명 모두 수다를 잊은 채 집중하여 그 내려지는 커피를 바라본다. "아, 음악이 있으면 좋겠어요." 하니 금방 선반 위의 자그마한 오디오 스위치를 켠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나온다. 이 멋진 분위기의 커피에 음악은 좀 못 따라오는 것 같아 아쉽다. "음악이 좀 커피에 비해 미진하네요." 하하 얌전히 있지 꼭 한마디 하고 만다. 아이 나도 참! 그러나 아쉽다. 대개 이렇게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즐기는 분들은 음악도 꽤 마니아들일 텐데 말이다. 미약하지만 그래도 음악이 함께 하니 좋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다.
직접 로스팅한다는 커피 알을 구경한다. "케냐 라가티 워시드 AA TOP입니다."로 시작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이디도 내추럴에 과테말라 엘 리모나르 휴휴테낭고 SHB에 이어 콜롬비아 나리뇨 수프리모 등등 호홋 무려 5잔의 커피를 리필해서 마신다. 말이 리필이지 매 번 새로운 커피로 처음과 꼭 같이 정성껏 내려주신다. 일일이 커피를 내린 후에 우리 앞에 놓인 찬 잔에 따라주며 "이것은 어느 커피다. 신맛이 좀 더 날 거다." 등 자상한 커피 설명도 해주며 어느 게 좋으냐 묻기도 한다. 온 정성을 다해 마지막 리필까지 아주 신중하게 핸드드립으로 내려 우리들 커피 잔에 부어주신다. 와우. 커피가 그야말로 끝도 없이 들어간다. 아, 커피 향도 좋고 바리스타들도 좋고 창 밖의 쏟아지는 빗소리도 좋고 하하 그야말로 비 오는 날의 오후 커피 한잔 아니 커피 여러 잔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암만 봐도 이 두 분. 직장 동료였다는 이 두 분. 커피 내리는데 정말 열심이다. 아, 저런 집중이라면 그 무엇도 못 할 게 없겠다. 바로 코 앞에서 커피 내리는 그 장면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들의 집중에 우리도 빨려 들어 집중 집중이다. 집중이란 얼마나 멋진 마음 상태인가. 은퇴 후 나름 노후를 잘 준비한 듯한 두 분께 짝짝짝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