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언철 Jul 21. 2022

학회 발표에서 살아남기

"선생님 심포지엄에서 발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선생님 일정은 없어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심포지엄 3달 전 발표를 부탁하는 선배의 전화를 받고 약간의 당황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수락을 했다. 3달 전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천천히 준비하지 뭐'


시간은 알게 모르게 흘러서 1달이 흐르고 2달이 흐르고 이제 1달이 남았을 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아... 이제는 진짜 준비해야 되는데...' 하지만 다른 일들로 또 잠시 잊고 지내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 보니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것이다.


발표 슬라이드를 만들 때 첫 장 만들기가 제일 힘들면서 중요하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하는 신호이자 제목을 정하고 나면 발표의 방향이 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첫 장을 만들기가 제일 힘들다.

의사가 되고 인턴일 때는 사실 발표를 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전공의가 되고부터는 발표의 연속이었다. 상시 있는 다양한 콘퍼런스, 연구 발표, 학회 발표, 초록 제출 등등 힘든 일과 중 연구 발표를 준비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연차가 높아지면 점점 발표할 기회가 더 많아진다. 우선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주된 연구자로 참여하고 작성한 논문이 있어야 한다. 논문 주제를 교수님께 받고 나면 시작이 된다. 논문 주제에 맞는 자료를 찾고 수집하고 수집한 데이터를 통계 처리를 하고 그 분석한 결과를 해석하고 해석한 결과를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 논문이다. 일단 데이터의 통계 처리가 끝나면 초록을 작성할 수 있다. 작성된 초록은 그 주제에 맞는 학회에 제출하게 되고 괜찮은 내용이라면 발표를 하게 된다. 구연 발표는 처음 해보는 전공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긴장을 느끼고 동시에 압박을 느낀다. 주변 선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나마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다 하지만 긴장과 압박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우선 정리한 데이터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발표를 하다 보면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주제와 관련된 결과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본인이 완전 이해가 안 되다 보니 옆길로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발표 슬라이드를 만드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발표 슬라이드는 청중들이 보기 쉽고 한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강조는 하되 너무 화려하지도 산만하지도 않아야 한다. 글자를 넣으려면 5 - 6줄 정도로만 최소화해서 넣는다. 처음 발표하는 전공의가 이런 것을 고려해서 슬라이드를 완벽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은 발표 전에 내부적으로 교수님들과 선배들 앞에서 먼저 슬라이드를 가지고 발표할 기회를 가진다. 물론 교수님들과 선배들 앞에서 하는 연구결과 발표는 학회 발표 전 예행연습의 의미도 있지만  결과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으로 연구가 가진 제한점과 허점을 파고들어 진땀을 빼게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연구 결과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발표 슬라이드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을 두세 번 더 거치면 점점 발표 슬라이드 다운 모습을 갖춰간다. 그렇게 본인 연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제한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학회 당일이 되면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발표 슬라이드를 보고 또 보고 발표 내용을 되뇌고 되뇐다. 좌장의 연자 소개로 발표는 시작된다. 이제 실전이다. 첫 슬라이드를 시작으로 그동안 준비했던 것을 풀어내고 나면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질문의 시간이 있다. 청중에서 연구 발표를 듣고 질문을 던진다. 이해가 충분히 된 상태이고 예행연습 때 한번 받아 본 질문이라면 답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머뭇머뭇할 수 있다. 그러면 듣고 계신던 교수님이나 선배가 대신 대답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면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다. 긴장이 풀어지고 이제 숨을 쉬어지는 느낌이 든다. 잘했든 못했든 끝났다는 홀가분함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심포지엄 2주를 남기고 본격적으로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일은 비슷한 듯하다. 닥쳐서 하면 집중이 잘 된다고나 할까? 발표 주제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 조사부터 시작이다. 논문을 찾고 찾은 논문 중 좋은 연구 결과를 선별하고 필요한 그림을 고르고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발표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정한다. 그렇게 슬라이드를 한 장 한 장 만들고 수정하고 지우 고를 반복하면서 완성해 간다. 가까스로 발표 슬라이드 제출기일을 맞춰서 제출하고 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다. 실제 발표할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만들어진 슬라이드를 봐줄 선배도 없고 검토해줄 교수님도 없다. 오롯이 혼자 준비하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정리하고 머릿속에 넣는다. 발표에 부족함이 없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한다.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어떤 연구에 대해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데자뷔 같은 상황. 좌장이 나를 소개한다. 연단에 서서 준비한 발표를 시작한다. 정신없이 준비한 것을 발표하고 나면 끝이 나있다. 섭섭함보다는 시원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잘 끝났다. 처음 발표와는 달리 긴장감은 덜하지만 발표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부담은 있다.


 누군가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해를 깊고 넓게 하고 있어야 하기에 연구발표를 준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주어진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준비하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연구 결과를 확인할 수도 있고 내 연구 주제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발표 준비를 하고 있을 동료들이 연구 발표에서 잘 살아남기를 바란다. 난 이번 발표를 잘 넘겼으니 한 동안은 맘 편히 지낼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