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선택의 순간 이렇게 물어보는 보호자들이 종종 있다.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마음을 정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겠지만, 실은 선택을 담당 교수에게 미룸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는 의도가 무의식에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환자에게 있어서 나는 어디까지나 의사일 뿐 보호자가 아니다. 내 의견은 의학적인 견해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거기에는 환자의 평소 신념이라든가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 보호자의 경제적 사정 같은 의학 외적인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의학적으로 내리는 판단과 보호자가 가족으로서 내리는 판단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자정이 넘은 시각,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오는 전화라면 분명 병원이고, 급한 일이다.
"교수님, 2년차 L입니다."
"...... 응, 무슨 일이니......"
설핏 들었던 잠이 완전히 깨지 못한 채 어눌한 소리로 물었다.
"APR 수술하고 열흘째인 S 환자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세 시간 전에 한 차례 vomiting 한 이후 saturation이 80까지 떨어졌습니다. Reservior mask로 산소 full로 주어도 saturation 90 이상으로 오르지 않아 optiflow 적용하였고 현재 FiO2 0.9, flow 60에서 saturation 95 겨우 유지됩니다. Mental도 drowsy 합니다."
한 마디로 구토로 인해 흡인성 폐렴이 와서 위독해졌다는 말이다. 85세 할머니 환자에게 생긴 흡인성 폐렴. 예감이 좋지 않다.
"얼른 중환자실로 옮기고 intubation 하세요."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기관삽관(intubation)하고 인공호흡기 달고 항생제 쓰면서 폐렴이 잡히기를 기다릴 것. 할머니가 폐렴을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서포트해 주면서 시간을 벌 것.
"그런데요 교수님, 보호자들이 intubation을 원하지 않습니다. 환자분이 평소에 이런 상황이 되면 힘들게 연명하지 말고 편안하게 보내 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닌데. 그럴 상황이 아닌데.
"intubation 안 하면 돌아가실 거라고 말했니?"
"네, 지금 환자분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intubation 하면 살릴 수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최선은 다하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안 하겠다고..."
나는 다시 한번 설득해 볼 것을 종용했지만 보호자들은 완고했고 설득은 실패했다.
다음 날 내가 출근한 이후에도 환자는 전혀 호전이 없이 1분에 서른 번씩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기관삽관을 할 것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보호자와 마주 앉았다. 지금 삽관을 안 하면 분명히 돌아가실 것이다, 일단 기관삽관을 하면 살아나실 확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수술은 잘 되었는데 폐렴으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최선을 다해 보자, 고 설득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하고 싶습니다."
S 환자가 아들과 함께 외래로 내원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15년 전 직장암 수술을 받은 부위 하방으로 새로운 직장암이 생겨 질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항문을 막아버릴 정도로 진행해 있었고 이미 15년 전 수술 당시 방사선 치료까지 시행했던 상황이라 수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관건은 복회음절제술에 부분 질절제술까지 꽤나 오래 걸릴 수술을 환자가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수술은 불가피하며 만약에 수술을 하지 않게 되면 몇 달 뒤에 위독한 상태에서 응급실로 오시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지만 환자와 아들은 여전히 수술을 결정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들이 예의 그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어머니라면 수술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저희 어머니는 아직 60대이시라 비교가 어렵겠는데요. 올해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가 비슷한 연세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3년을 요양원에서 가족도 못 알아보고 연명만 하셨던 터라 만약 저희 할머니와 같은 컨디션이라면 수술을 안 했겠네요. 하지만 어머님께서 그런 상황은 전혀 아니시잖아요. 이렇게 정정하신데. 이건 환자 개개인의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에 제가 결정 내려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만약에 저희 어머니와 똑같은 상황이라면요?"
아들은 집요했다. 환자는 수술이 꼭 필요했고 나는 이 아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해야죠. 해야 되는 상황이고, 충분히 견뎌내실 수 있을 거 같으니까요."
내 말이 보호자의 마음의 짐을 조금은 가볍게 해 주었던 것일까. 마침내 환자와 아들은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환자는 마지막으로 찾아온 고비를 넘지 못했고,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아들은 분명 지난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수술을 하지 말 것을, 그러면 한 일 년은 더 사셨을 것을, 괜히 수술을 해서, 의사의 설득에 넘어가는 바람에. 하지만 모든 것은 결과론일 뿐이었다. 수술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더라도 아들은 몇 달 뒤 대변을 못 보고 복통으로 끙끙대는 어머니를 응급실로 모시고 오며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지난 선택을 후회해서 무슨 소용인가. 지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위독한 어머니를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였다. 나는 환자를 꼭 살리고 싶었다. 환자는 용케도 지난 밤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고 버티고 있었다. 기관삽관만 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환자를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드시 살릴 터이니 일단 삽관을 하고 보자는 만용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기관삽관을 하더라도 환자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기관 삽관이라는 선택이 또 한 번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고, 후회와 두려움이라는 감정 앞에서는 어떠한 설득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설득은 결국 실패했고, 환자는 며칠 뒤 돌아가셨다.
내 판단이 보호자의 결정과 상반될 경우 나는 고민에 빠진다. 내 결정을 따르도록 설득할 것인가 아니면 보호자의 결정을 지지해 줄 것인가. 의학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든 환자를 설득해 보겠지만 의학이라는 것이 항상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허다하다. 만일 성공 확률이 99% 이지만 1%의 확률로 실패할 경우에는 환자가 사망할지도 모르는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환자에게 수술을 받을 것을 강력하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성공 확률이 90%라면? 혹은 20%밖에 안 된다면? 나는 매 순간 무엇이 환자를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어떤 결과가 따를지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의사라고 해서, 의학적인 지식이 조금 많다고 해서, 환자의 중요한 삶의 결정을 내가 내려줄 수는 없다. 최종 결정은 언제나 환자 본인과 보호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만,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환자를 떠나보낸 담당 의사의 심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아들의 선택이 현명한 결정이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