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봉역 4번 출구 앞 좌회전 후 걸어서 3분 거리, '코코 약국'과 '한솥도시락'사이에 '솔샘 책 대여점'이 있다. 22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년이 된 한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곳. 문을 여는 순간 코를 간질거리는 책 냄새가 나를 맞이한다. 두세겹의 움직이는 책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래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만화책부터 판타지, 연애소설까지.. 수많은 책들이 겹겹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 두살이나 먹어서인지 나와의 추억도 많은 곳, 이곳은 '솔샘 만화방'이다.
대치중학교에 다니면 그럭저럭 모범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주변에 유해업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뒤는 바로 양재천이요, 학교 앞은도곡근린공원이었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스마일 문방구'라는 작은 문구점을 제외하고는 죄다 아파트였다. 우리에게 놀이란 학교에서 농구나 와리가리를 한다던지 스마일 문방구에서 파는 컵떡볶이나 슬러시를 마시며 도곡 근린공원에서 수다를 떠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는 흔했던 학교 앞 오락실 하나 없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곳이 '솔샘 만화방'이었다. 단돈 300원이면 만화책 한 권을 빌려볼 수 있는 시스템은 혁신적이었다. 다섯 명이서 300원씩만 모아도 다섯 권을 돌려볼 수 있는 것이었다. 자본에 자유롭지 않았던 우리들은 자연스레 책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순정물, 학원물, 무협물. 계모임을 하듯 책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틈틈이 학교에서 또는 방과 후 공원에서 만화책을 봤다. 나에게 공유경제의 시발점은 솔샘 만화방이었다. 물론 1년 뒤 PC방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친구들이 떠났지만, 첫사랑을 추억하듯 신간이 나오면 이야기꽃을 피웠다.
만화로 많은 것을 공부하기도 했다. '고스트 바둑왕'을 보며 바둑의 룰을 배웠고, '바람의 검심'을 보며 친구들과 일본 메이지유신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다. 한 번쯤 주인공이 되는 달콤한 꿈을 꾸기도 했다. '김전일'이 되어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꿈을, '짱'의 현상태가 되어 주먹으로 강남을 휩쓰는 꿈을, '열혈강호'를 보며 무협지의 주인공을, 뭐, '굿모닝 티쳐'를 보면서 선생님이 되는 꿈도 꾸곤 했다. 아주 가끔. 꼭 좋은 생각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데스노트'를 보고 나서는.. 뭐 말해 무엇하랴. 이 만화책을 봤으면 마음속 살생부 하나쯤은 있었겠지? 솔샘에서 친구들과 만화책을 돌려보며 쉼 없이 수다를 떨던 호시절이었다.
솔샘 만화방은 우리에게 단순한 만화책만의 추억을 안겨준 곳은 아니었다. 매봉역 삼거리에 수많은 가게들이 망하는 동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어느 순간부터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강남역 지오다노처럼 동네 친구들과 약속 잡을 때는 '매봉역 빠바 앞'이나 '솔샘 앞'이 고유명사였다. 동네 친구와 약속 잡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가게들은 항상 '거기 있잖아 거기~~ 솔샘 옆 건물, 솔샘 맞은편!' 등으로 불리곤 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곳도 위기를 겪었다. 공유경제가 인터넷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발걸음이 뜸해졌다. 푸르나, 당나귀. 한 번도 이용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이용해본 사람을 찾기 어려울 만큼 유용한 이 사이트들 덕분에 무수히 많은 만화책이 공짜로 풀렸다. 만화책을 빌려서 보는 만화방 대신 분위기 좋은 만화책방이 주변에 생긴 것도 한몫했다. 쥐포와 콜라 그리고 포근한 소파와 만화책, 찰떡궁합 아닌가? 나 조차도 대학생 이후에는 드문드문 이용했다. 대부분의 만화방은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대여점이라 불리었던 곳들(DVD, 비디오)과 운명을 함께했다.
솔샘은 책 대여점으로의 변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만화책은 매대에서 조금씩 줄여나갔으며 남은 부분을 판타지소설과 무협소설로 채웠다. 사기엔 아깝지만 보고 싶은 책들. 도서관에서도 잘 들여놓지 않는 책들을 중점적으로 진열했다. 가게 이름도 '솔샘 만화방'에서 솔샘 책 대여점'으로 바꿨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서초구와 송파구에서도 차를 몰고 사람들이 한 보따리씩 판타지소설을 빌려가곤 한다. 실제 타워팰리스에 사는 연예인들도 종종 책을 안아름 들고 다녀가는 곳이 되었다. 경쟁자들이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이제는 노부부가 되어 검정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지고 나이를 이기지 못해 거동도 예전만하지 못하지만, 사업만큼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화방에 갔다. 원펀맨, 진격의 거인 신간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있던 천 원을 꼬깃꼬깃 내밀었다. 한 권에 사백 원, 당연히 받을 줄 알았던 거스름돈을 주지 않길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주머니 머리 위에 '4월부터 만화책 오백 원, 소설은 천오백 원 내외로 오릅니다'라는 팻말이 선명했다. 아주머니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책값이 올라서 어쩔 수 없지 모야"
책을 빌리고 나오는 길, 한솥도시락 옆 안경점에 큰 플랜카드가 붙어있다. '임대 문의 010-XXXX-XXXX','5월 31일까지 매장 정리! 안경세일합니다.' 5년 정도 버티던 안경점이 문을 닫는 것이었다. 바람 잘 날 없는 골목이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책값 올려도 되니 오래오래 해주세요.'
허름한 간판, 들어가면 누~~런 책 투성이들인 곳. 특정 책이 있냐고 물어보면 노부부가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 하나하나 천천히 두드리는 곳.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직접 고객들한테 '저기~ 저기 가보세요.'라고 시키는 곳. 누군가에는 그저 낡은 서점같겠지만 나에게는 많은 추억이 겹겹이 쌓여있는 곳.이곳은 '솔샘 만화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