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은 뭐 색다른 보상사례 없나?"
새로운 달이 시작하기 마감 삼 일 전 사수와 나는 그달의 보험금 사례들을 까보며 사례집을 만들었다. 어떤 사건으로 보험금이 지급되었다는 현장 교육용 자료. 누구의 불행은 곧 누구의 행복인 법. '너도 이럴 수 있어.' 공포 마케팅. 보험 판매의 가장 원초적인 방법 중 하나. 매달 하는 루틴한 작업이지만 매달 새로워야 한다는 점. 자극적이면 더할 나위 없다는 점. 에어컨이 너무 강해 서늘하기까지 한 사무실에서 시체를 뒤적이는 두 마리 하이에나였다.
우리 회사는 교권침해라는 특이한 상품이 있다. 학생, 동료 교사, 학부모 등이 선생님의 교권을 침해했다 인정되면 보험금을 주는 상품이다. 학생 또는 학부모의 욕이나 폭력 등의 직접적 사고가 대다수였는데 6월은 교권침해 사건도 언택트했다. 담임이 아침마다 깨우는 목소리가 싫다고 SNS에 지속적으로 올린 학생, 맘카페에서 목소리와 외모를 품평하는 학부모들. 사고도 진화한다. "이 정도 사건은 그냥 애들이랑 짜고치면 받을 수 있지 않겠냐?" 옆에서 사수가 툭 한마디 던졌다. 선생님들이여 분노하지 마라. 뭐든지 사기부터 의심하는 보험회사 15년 차의 직업병이니까. 서늘한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제야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회사에서 잊고 있던 여름 바람이었다.
작년 오늘은 동생 수술일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길여사를 차에 태우고 도곡동에서 30분거리인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손에는 묵주와 성경을 꼭 쥐고 말이다. 참 나, 종교도 안 믿는 사람이. "코란도 들고 오지. 이왕 할 거면 화끈하게 세명한테 다 빌어야지." 더부룩감을 느끼고 찾아간 병원, 그리고 종합검사. 징후가 늦게 나타나 발견하면 이미 말기라고 하여 침묵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췌장암을 동생은 운좋게 초기에 찾아냈다. 수술은 아침 8시. 의사 선생님은 종양이 작아 수술은 걱정 없이 잘 진행될 거라며 편하게 오라고 안심시켰다. 길여사는 차 안이 더운지 옆에서 연간 땀을 흘렸다. 자연스레 강해지는 에어컨 바람 세기와 냉랭한 공기.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자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시간이었다.
이달에는 다양한 사건이 많았다. 손녀가 사고에 휘말려 급히 돈을 입금해야 한다는 전화에 돈을 입금한 보이스피싱 사건, 동생과 베개 싸움을 하다 발을 밟아 발가락이 부러진 아이, 부당한 계약 거부에 맞선 시간강사의 소송.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손가락 골절 사건이었다. 운전하는 차 안에서 싸우다 뛰쳐나가는 여자 친구를 잡기 위해 급히 차 문을 닫다 엄지손가락을 빼지 못한 사건. 얼마나 급했으면.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운전 중 사건으로 인정돼 상해뿐만 아니라 운전자 보험에서까지 보험금이 지급됐다는 것이다. 무려 800만원 언저리. 나에게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참, 세상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정리한걸 다 보더니 의심병 많은 사수가 한마디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냐."
작년 동생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내가 췌장암일 수가 있지." 흡연이 가장 큰 원인이며 고령의 나이에 주로 발견되는 췌장암. 의사인 동생은 췌장에 종양이 있다는 소견을 들었을 때 본인이 공부했던 책들을 뒤적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성인지 악성인지,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더 보기 위해서. 모든 병에는 원인이 있다 라고 믿는 동생은 그래서인지 더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했다. 절박하면 누구나 의료쇼핑을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사람 다 똑같구나. 인정하기까지 딱 한 달. "뭐. 이런 일도 있더라고." 차트로 종양의 크기가 작음을 확인하고 담담하게 복강경 수술을 선택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보험 사기 같아. 오른손가락 하나 부러진건데, 너무하잖아.
"에이.. 이미 보상과에서 다 알아보고 준 건데. 여자 친구를 정말 잡고 싶었나 본데요. 급하면 그럴 수도 있죠."
사수는 손가락 골절 사건은 교육자료에서 빼자고 했다. 보험사기가 의심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자 친구도 공범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험조사부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다는 말은 덤이었다. 평범하지 않지만 의심스럽지 않아야 한다. 그럴 거면 직접 찾던가. 에잇! Delete키를 누르는 둘째 손가락에 힘이 팍 들어갔다. 매월 말 일상이 된 투닥투닥 장면. 그때 친한 후배에게서 갠톡이 왔다. '형 동생이 내 차 이틀간 운전할 건데, 이거 가입하면 돼?' 친절하게 우리 회사 원데이보험 어플을 캡처까지 하며 보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수술은 예정된 시간인 오후 두 시를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넉넉잡아 이야기했던 예상 수술 시간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일분이 한 시간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가져간 책은 몇 페이지 읽지 못한 채 멍하게 앉아있다 누워있다의 반복이었다. 오후 네시. 여덟 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으나 바로 회복실로 들어갔다. 긴 시간 전신마취는 몸에 많은 무리를 안겨줬다. 끝내 당일에 보지 못하고 밤늦게 출근을 위해 집에 들어가는 길, 동생에게서 수술이 잘 끝났다는 톡이 왔다. '진짜 떼고 보니 암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하나 더 들어놓을걸.' 농담하듯 동생은 내가 암보험을 추가로 권했던걸 이야기했다. 뭔가 확신이 있어서가 아닌 매출 압박에 시달려 억지로 계약을 들이밀던 현대해상 지점장 시절이었다. '안 받는 게 최고지 무슨. 그리고 넌 이제 인수 거절체야. 앞으로 몸 관리나 잘해.'
'근데 이틀만 운전할 건데 사고가 날까? 생각보다 비싸네. 그냥 안 드는 게 낫지 않을까.'
보험 가입절차까지 다 설명해주니 갑자기 김 빠지는 얘기를 하는 후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썼다 지우고 '뭐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뭐.'라는 답을 보냈다. "어떤 보험을 가입해야하요?"라고 묻는 건 점쟁이한테 "내가 어디가 아플까요? "라고 묻는 거와 똑같다. 10년차 보험쟁이에게 점쟁이를 요구하면 반칙이다. 수술 후 멀쩡해진 동생은 그 후 과실 제로인 자잘한 자동차사고를 두 번이나 당했다. 상대방만이 백퍼센트 과실이 있는 본인은 멀쩡한 사고들. 받은 보험금만 수백만원. 반면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매달 수십만 원 보험료를 내지만 자잘한 실손 한번 청구해보지 않은 사람. 뭐, 딱히 아쉬울건 없다. 나쁘지 않았다는 반증이니까.
보험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위해 멀쩡한 누군가는 돈을 내야 하는 일종의 계모임.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 적립하는 최소한의 안정장치 같은 것. 많이 넣을 필요도 없다. 실손과 3대 진단 정도면 딱. 가족력이나 다른 질병이 있으면 조금 더 가입하는것도 찬성. 어느정도는 사람바이 사람. 변액.. 종신.. 사망 보험금... 솔직히 돈 아깝다. 나이가 조금 있다 싶으면 안들고 돈을 모으는것도 방법이다. 현금이 최고인 세상이니까. "난 실손보험금 한번도 받아본적 없는데 나이든다고 매년 오르는게 짜증나." 이런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래에 보험금 청구할 일이 없다는 건 그만큼 건강하다는 거니까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자. 너그럽게 삽시다 쫌! 매년 실손 보험료 오른다고 툴툴대지말고.
그리고 위에 쭉 보여주지 않았는가.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