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만 닿았던 마음,

그리고 나의 아이가 건네는 오래된 감정

by 혜다온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문득 문득 지나간 나의 어린 시절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특히 막둥이를 볼 때 그렇다.

막둥이는 아직 어린데도 억울했던 일들을 오래 품고, 그 감정을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나에게만 꺼내놓는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오래 기억할까?” 싶다가도 금세 깨닫는다.

'아, 이 아이는 나를 믿는구나.'

'나에게라면 진짜 마음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구나.'

그 모습이 너무 낯익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어릴 적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니까,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나

나는 어릴 때 “엄마니까” 제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짜증, 억울함, 두려움, 혼란을 엄마에게만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정작 돌아오는 건 따뜻한 품어짐이 아니라 역정과 차가운 말들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잘못한 건가?'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와서야 알겠다. 엄마는 나의 감정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누군가의 마음을 깊게 품어본 경험이 없었고 자신의 상처도 돌볼 여력이 없었던 세대였다는 걸.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에게 품었던 따뜻함과, 돌아오지 않았던 기대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시어머니를 참 좋아했다.

다섯 자식을 책임 하나로 건사하고, 손주들까지 돌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 강인함이 그저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아플 때, 힘들어서 남편에게 날카롭게 말했던 그 순간에는—시어머니는 결국 ‘며느리’의 편도, ‘한 인간’의 편도 아니라 그저 자기 아들의 편이었다.

그때 느꼈던 묘한 상실감.

마치 내가 건넨 따뜻함이 한순간에 허물어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그분의 ‘한계’일 뿐이었다.

그 세대의 많은 어른들이 그렇듯 자신의 아들에 대한 충성, 자신의 역할만으로 버텨온 삶, 자기 감정 너머의 세계를 보는 눈이 그분에게는 없었을 뿐이다.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막둥이가 억울함을 꺼내는 이유

막둥이가 몇 년 전 일을 억울해하며 끊임없이 나에게 말하는 건 그 아이가 나를 탓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만큼은 진짜 마음을 보여도 안전하다는 증거다.

아이들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믿는 사람에게만 감정을 쏟아낸다.

엄마에게만 투정 부리는 이유는 엄마가 약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가장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둥이의 억울함은 그때 마음속에 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이제 언어가 생기고 표현할 여유가 생기면서엄마에게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내가 그때 받지 못했던 품어짐을 이 아이에게는 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가끔은 마음을 울리고, 가끔은 나를 치유한다.

어린 나를 돌보지 못했던 어른들, 그리고 이제야 자라는 ‘내적 양육자’

나는 어릴 때 정서적으로 충분히 품어짐을 받지 못했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한 사람,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한 사람이었다.

그 부족함 때문에 나는 시어머니에게서 그 따뜻함을 찾기도 했고, 때로는 세상에서 그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찾던 그 사람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나’였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내 안의 아이를 내가 품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 환경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막둥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어릴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을 거꾸로 아이에게 건네고 있다.

그 따뜻함이 내 과거를 치유하고, 내 현재를 단단하게 하고, 내 미래를 조금씩 비추기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환경의 피해자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육자가 되어가는 사람이다.

아이를 품으며 내 안의 아이도 함께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자유로워지고, 따뜻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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