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런 문장을 보았다.
“결핍은 상대방을 지독히 괴롭힌다.”
처음엔 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문장은 곧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나의 결핍을 엄마에게 투영했고, 그것으로 엄마를 많이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했고, 너무 기대했고, 너무 엄마에게서 채우려 했다.
결핍은 늘 그렇게 작동한다.
미워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가 아니라 질책과 비난으로 건네던 관계.
부족함은 대물림되었고, 말은 점점 날이 섰다.
나의 남편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5남매의 막내, 첫째의 장애로 가족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쏠린 집.
그 집에서 ‘시도’는 위험한 것이었고,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따뜻함보다 계산이 먼저였고, 과정보다 결과가 앞섰다.
나에게 건네진 말들은 대부분 날이 서 있었고, 나는 점점 나를 지키기 위해 대화를 줄이고, 기대를 접고, 마음을 닫았다.
지금은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사는 편이 더 편하다.
홀가분하다.
수술을 했을 때 면회조차 오지 않았던 기억들, 결혼 생활 속에서 들었던 수많은 말들.
나는 그 안에서 계속 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관계를 바꾸려 애쓰는 대신, 나를 보호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기대를 내려놓는 건 사랑을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
이제 나에게는 세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이 고리를 여기서 끊을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덜 아픈 세계를 건네줄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완벽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안전한 어른이 되는 것.
실패해도 관계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것.
결과보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어?”라고 묻는 어른이 되는 것.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대신 감당해주는 엄마가 아니라, 자기 감정을 책임지며 회복하려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남기고, 조용히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
그것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미래의 어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안다.
이 고리를 끊는 사람은 소리치지 않는다.
비난하지 않는다.
증명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해 내가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다만,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면 된다.
그것으로 고리는 충분히 끊어진다.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아주 조금이라도 머물렀다면 다음 글에서 다시 만나도 좋겠습니다.
조용히, 계속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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