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논의 시작을 위한 논의, 보편적 복지 이야기.
지난 19대 대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개인적으로 꼽아본다면 몇몇 유력 후보들의 공약집에 기본소득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는 당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후보들이 주장을 해왔다면, 이번에는 이재명 성남시장, 심상정 정의당 당대표 등이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냈다. 기본소득의 정의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국가가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금액을 모든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주는 복지 제도를 말한다. 대선 후보들이 먼저였는지, 사람들의 기대감이 먼저였는지 모르겠으나, 지난 대선에서 나름의 이슈를 끌었던 것은 확실하다. 기본소득을 공약집에 포함시켰던 후보가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장점과 단점, 실현 가능성, 재원 마련의 문제 등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기본소득은 조금 신기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과 기본소득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용어의 정의에서부터 느껴지는 본능적인 꺼림칙함이다. 본인은 이 논의를 꺼내자마자 빨갱이냐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있다. 이런 격하고 근원적인 감정은 그 감정의 이유를 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해내기 어렵다. 하지만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 지인과의 긴 대화를 통해 다음의 문장을 들을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은 이해하지만, 부자에게는 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비실용적이지 않을까?
이 글의 목표는 저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 더 많은 사람들이 더욱더 깊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예시를 들면서 시작해보자.
나는 연봉이 3억이 넘고, 내 소유의 집이 대치동에 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도둑이 들었던 흔적이 있다. 그래서 경찰서에 전화를 한다. 대화가 이어진다.
나 : 여보세요. 경찰서죠? 저희 집에 도둑이 들어서요.
경찰 : 네 본인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나 : 123456-1234567이요.
경찰 : 잠시만요. 조회해 보겠습니다. ... 조회 결과, 귀하는 대치동에 시가 20억에 가까운 집을 가지고 계시고, 연봉이 3억이 넘기 때문에 경찰서비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설탐정사무소에 의뢰해보세요.
사실 (연봉 3억에서부터 이미...) 말이 안 되는 상상이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경찰서비스를 지원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있다 해도 그 국가는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상상이다. 밑바닥부터 단계별로 상상해보자. 먼저, 경찰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될 것이다. 법은 있지만 제제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무력을 동원하려고 하는 사람,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는 사람 등이 나타나서 평범한 사람들도 살기 힘든 세상이 되리라 예상된다.
다음은 경찰이 있지만 선택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이다. 빈자에게만 경찰력을 제공하는 경우보다 부자에게만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둘 다 비현실적이지만 그나마...) 더 현실적이므로 그쪽을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부자들은 불만이 많을 것이다. 어느 정도 자산 규모가 되면 보디가드 채용을 고민해야 하고, 집에 방법 장치를 강화할 고민을 해야만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과 다르게 이 가정 속에 사는 부자들은 뭔가 불공평하다는 불만을 항상 안고 살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기초노령연금제도와 같이, 현금을 제공하는 복지 제도도 있다는 점을 종합해보면, 지금의 경찰 서비스는 국가에서 운영하고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돈이 아닌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는 복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찰력이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로 완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사회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그래야 된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몸짱이든 장애인이든 누구든지 길거리를 걷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범법자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서비스도 부자든 빈자든 제공받아야 합당하다고, 대다수 구성원들이 합의해서, 혹은 그들에게 권력을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기관(정부 등)에서 결정해서 법과 제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기본소득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현상도,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2016년에 있었던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76.9% 라는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유의미했다고 생각한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은 수의 구성원들이 술자리에서든, 학급 토론에서든 기본소득의 장단점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해봤을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 기본소득이 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신문이나 TV, SNS 등의 수많은 매체를 통해서, 각 분야의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다양한 층위와 깊이의 의견을 내고 격렬하게 토론했을 모습도 자연스레 상상이 된다.
또한, 이 국민투표 자체가 스위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 다루었고, 이 사건 자체로서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에 포함된 작은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기본소득이라는 보편적 복지 아이디어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상대를 빨갱이로 몰지 않고도 같이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런데 왜 하필 서비스가 아니라 돈으로 지급하냐고? 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