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리뷰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아라가키 유이!! 내가 이 드라마를 '한 번 봐볼까?' 생각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 후에 줄거리를 보니 법률혼도 사실혼도 아닌 계약 결혼이라는 신선한 주제어가 있었다.
결혼이 의무임을 전제로 만들어진 말이 3포 세대, 5포 세대와 같은 단어들이다. 결혼이 왜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포기의 대상인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결혼을 선택의 영역에 놓은 두 사람이 계약 결혼이라는 옵션에 동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다. 남자 주인공 츠자키 히라마사(호시노 겐 분, 이하 츠자키)는 모태솔로남이자 프로 독신남이며 자신의 인생에 연애와 결혼은 없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실하고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여자 주인공 모리야마 미쿠리(아라가키 유이 분, 이하 미쿠리)는 대학원까지 나왔음에도 회사에서 잘리고 나서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모든 일은 미쿠리가 우연히 츠자키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고부터 시작된다. 의외로 미쿠리는 가사를 하며 돈을 받는 생활에 만족하고, 츠자키는 돈을 주고 가사를 해결하는 편리함에 만족한다. 결국 두 사람은 '계산에 의해' 계약 결혼이 '더 돈을 아끼는 길'임을 알고 외부에는 법률혼 관계로, 실제로는 계약 결혼 관계로서 애매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근로계약서도 만들고, 서로를 고용주와 노동자로서 명확히 인식하여 그에 맞게 행동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두 사람은 이성적이기만 하던 계약 결혼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서의 법률혼으로 넘어간다. 그 과정, 관계가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도 같이 두근두근와쿠와쿠했다. 드라마 제목은 도망치는 것이 도움이 된다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것보다 마주하고 같이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간다는 스토리다.
드라마를 보며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가사노동의 가치 환기,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회사의 사용자와 근로자 관계에 비유하며 두 관계의 모습이 겹쳐 그려지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일본 젊은이들이 결혼을 꺼리는 분위기, 여성의 나이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의 문제점, 성소수자 문제 등을 다룬 것도 인상적이었다. 두 주인공이 자존감이 낮아서 공감될 때가 많았다. 나도 그들처럼 자존감이 탄탄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그들의 고민과 나의 실제 고민에 비슷한 지점이 많았다. 또한 드라마가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고 실제 결혼 생활 중에 겪을 법한 고민들을 다룬 것도 맘에 드는 점 중 하나였다. 일본 드라마인 만큼 역시 교훈을 주려 노력하는 점도 눈에 띄었으며 미쿠리의 '망상 시리즈'를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 좋았던 점도 있다. 내 직업이 프로그래머라서 주인공이 회사에서 철야하는 모습이나 고생해서 디버깅하는 장면을 보며 굉장히 안타깝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공감가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모 드라마에 프로그래머가 주인공으로 나왔었다. 다만 과하게 extraordinary 한 사람으로 비춘 부분(프로그래머라고 해서 굳이 천재로 나올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이나, 시청자들의 무지를 예상 했는지 어설픈 장면을 내보내서 프로그래머에 대한 몰이해를 조장한 부분(GuguClass=구구단을 굉장히 빠르게 타이핑하고 있는 장면. 누가 구구단을, 그것도 타이핑을 빨리 한다고 프로그래밍 잘한다고 생각할지 궁금하다.)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에 비해 이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평범하지만 성실하고 능력 있는 정도의 프로그래머로 나왔고, 프로그래머로서 현실에서 겪을 법한 상황들이 나와서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었다. (잦은 야근, 갑작스러운 요구사항 변경이 있지만 일정은 늘려주지 않아서 날새는 상황, 어렵게 디버깅에 성공한 후 알 수 없는 화면을 보며 모두가 같이 기뻐하는 상황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이 드라마에 나오지는 않지만, 일본에서는 여성을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비유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12월 25일 당일까지만 불티나게 팔리고 그 뒤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상품인데, 일본 여성이 25세를 전후로 사회적으로 그런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나이 즈음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여성은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으로 분류된다. 독한 마음을 품고 커리어를 위해 결혼을 포기했거나 문제가 있어서 결혼 시장에서 패배했다는 이미지 둘 중 하나다. 같은 맥락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생머리에 염색을 한다든지 화려한 색의 치마를 입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꼴불견으로 비친다고 한다. 2016년에 방영했음에도 드라마에는 그런 시선이 나온다. 굉장히 자주, 그리고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심지어는 이런 시선이 여자 주인공에게 교훈을 주기도 한다.
그런 드라마의 장면들이 사회의 편견을 환기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면 좋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지나가는 장면도 매우 많으며 드라마에서 제시하는 문제 해결 방안도 옳지 않아 보인다. 그 편견을 깨야하는 사람이 결국은 여성이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사회 분위기 변화를 촉구하거나 제도 개선, 남성의 시선 철회 등을 문제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에게 ‘너의 나이 혐오가 결국엔 나이 든 너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렴.’ 이라며 일침 한다. 우리나라에도 '여적여' 프레임, 30세 전후로 결혼하지 못한 것을 걱정'시키'거나 노산을 걱정시키는 사회 분위기 등이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일본의 맛이 좀 더 강렬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볼만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사노동의 가치와 도망치는 행위의 영향을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는 점 만으로도 그랬다. 씁쓸한 뒷맛을 조금 각오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