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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 Mar 07. 2019

캡틴 마블은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캡틴 마블> 스포 있는 리뷰

※ 이 글에는 영화 <캡틴 마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고는 도저히 쓸 수 없었습니다.



올해 4월 말에는 빅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 이 개봉한다. 이를 앞두고 <캡틴 마블>이 개봉했다.


곁가지들은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마블 영화의 유머러스함은 여전했다. 고양이는 넘나 귀여웠다. 고양이는 세상을 구한다. 단독 히어로 영화 중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캡틴 마블> 포스터


캡틴 마블을 기다려왔다

조금의 걱정이 있었다. <블랙 팬서>를 기다릴 적에 나는, 갑자기 등장한 블랙 팬서라는 히어로가 감히 아이언맨을 대신해 어벤져스의 리더가 된다는 루머를 듣고 마뜩잖은 기분이었다. <캡틴 마블>도 마찬가지였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서 사라져 버린 우리의 히어로들이 있고, 허망하게 손도 못쓰고 당해버린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있다. 여기서 뜬금없이 등장해서 '내게 제일 세!'라며 타노스를 뚜까 패는 모습은 도저히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다 반신반의하며 봤던 첫 번째 트레일러의 마지막 대사가 기억에서 쉽사리 잊어지지 않았다.


I'm not what you think I'm.


<캡틴 마블> 트레일러 중


반신반의에서 '신'의 비중을 조금씩 높여가기 시작했다. 영미 판, 한국어판 가리지 않고 트레일러며 티저 영상이며 각종 홍보영상과 배우 인터뷰 영상 등등을 찾아봤다. 개봉일이 3월 6일로 확정되고 예매율이 90%가 넘는 모습 등을 보며 내 기대도 늦은 출발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블랙 팬서>도 보기 전과 후의 내 평가가 180도 달라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마블인데' 생각하며 적당히 일정이 널널한 금요일에 예매를 해두었다.


그리고 개봉 첫 날인 오늘, 여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에 양치질을 하며 페이스북에 접속했고, 페친의 '캡틴 마블 대박!'이라는 포스팅을 보고 갑자기 오늘 꼭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반쯤 흥분된 상태로 세 종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앱을 모두 뒤지고 뒤져서 적당히 큰 크기의 상영관에 적당히 뒤쪽 자리를 예매해버렸다. 금요일 표는 이미 뒷전이었다.



감정적이어선 안돼, 감정적이어서 안돼

영화는 기억을 잃고 크리 족의 전사로서 훈련받는 '비어스'(= 캐럴 댄버스, 이하 캐럴)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캐럴은 크리 족의 전사로서 훈련받으며 끊임없이 '감정'에 대한 통제를 강요받는다. 욘 로그가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캐럴에게 말하는 상황이 몇 번 등장하는지도 모를 정도다. 당장 기억나는 장면만 최소 네 번은 된다. 악몽을 꿨다고 고백하는 캐럴에게도, 지구에 홀로 남겨진 캐럴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작전을 위해 우주선에 캐럴과 함께 탑승한 크리 전사들 중에는 웃지 않는 이도 있었다. 또한 캐럴을 오랫동안 속으로 싫어했던 미네르바를 보면, 관계 속에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면 스크럴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스크럴이 적을 총으로 쏘기 전에 아이 눈은 가리는 장면, 캐럴을 처음 만난 스크럴 종족의 아이가 손을 잡고 데려간 장소가 게임기 앞이었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인사법이 얼굴을 맞대는 것인데 서로 적대적이지 않은 문화임이 간접적으로 느껴졌으며, 온정적인 대화도 주고받는다. 악역인 크리 족이 감정을 억압하는 분위기이고 선역인 스크럴이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영화가 의도한 장치일 것이다. 플러큰이 잡아먹은 것은 크리 족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크리 족의 일원으로서 감정을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는 장면마다 캐럴은 자신의 능력을 억압했고 감추었다. 그런 환경에서 6년을 버텼다.


그렇다고 그 6년 이전의 세월이라고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청소년, 청년, 훈련받는 군인 그리고 파일럿인 각각의 캐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 앞에는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안된다고 말하고, 감정적이라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캡틴 마블> 포스터


억압과 통제로부터, 해방과 자기 확신으로

캐럴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비밀을 알고부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기 시작한다. 기억을 되찾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일이었다. <겨울 왕국>의 엘사가 'Let it go'를 부르는 순간의 정동이 떠올랐다.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엘사는 자신의 능력인 얼음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되었기에 가능했고 그로 인해 자기 능력에 확신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마찬가지였다. 넘어진 과거 모든 순간의 캐럴들은 똑바로 일어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지구에 추락한 캐럴을 추동한 것은 스스로의 직감과 감정이었다. 자기를 되찾은 캐럴은 크리 족 색의 옷을 더 이상 입지 않기로 다짐한다. 스스로를 누르고 있던 통제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캡틴 마블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사지를 펼쳐 대(大) 자로 날아가 몸으로 부딪혀 적을 부숴버리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해방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캡틴 마블은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욘 로그는 추하게도 이미 자유로운 상태의 캐럴을 통제하려 든다. 그는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라고 말한다. 감정을 억누르고, 힘을 통제한 상태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해보라 한다. 증명을 요구하는자는 대개 그렇듯 권력의 우위에 있다. 그러나 캐럴은 가볍게 포톤 블라스트를 먹여주고 다가가 대사를 날린다.


I don’t have to prove anything to you


<캡틴 마블> 포스터


<캡틴 마블> 캐럴 댄버스 역에 브리 라슨이 캐스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트집 잡기는 끊이지 않는다. 여자는 강력한 히어로가 안 어울린다, 못생겼다, 아줌마 같다, 트레일러 잠깐 봤는데 액션 연기 못한다, 여자가 왜 포스터에서 웃는 얼굴이 아니냐, 인성이 별로다 등등. <캡틴 마블>의 홍보 영상, 인터뷰 영상, 기사, 트레일러 영상 등 모든 콘텐츠의 댓글란에 악플이 달린다. 악플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브리 라슨이, 캐럴 댄버스가 그리고 캡틴 마블이 자격 없다는 것이다.


글쎄, 어느 시점 이전이었다면 끊임없이 자격을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임에도 이렇게 강하다, 여성임에도 히어로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따윈 없었다. <캡틴 마블>은 그저 캡틴 마블을 보여주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금요일 예매 티켓을 취소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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