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을 편지
정현이 형에게
오랜만이야 정현이 형.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갑자기 편지를 쓴 까닭은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에라도 하고 싶어서야. '그때'가 언제였는지 알아챌지 모르겠다. 나는 사실 페이스북이 과거의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알려줘서 매년 강제로 되새기고 있었거든. 그 포스팅에 여전히 달려있는 우리의 댓글 타래를 보다가 이렇게 펜을 들었어.
나는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듣다가 빡친 마음을 페이스북에 토해냈어. 그 날 강의 중에 너무 어이없는 말을 들었거든. '전기 회로의 (전압) 전원에는 큰 저항이 있다.'는 말이 명백히 오류인 건 형도 잘 알잖아. 막말로 이건 조금만 똑똑한 중학생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내용이야. 어떻게 교수가 대학교 3학년 전공수업에서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틀릴 수 있냐고, 이런 수업을 듣고 있는 내 돈과 시간이 아깝다고,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형은 댓글로 그랬지. "이거 안 지우면 너랑은 절교다."
형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댓글을 달았어. 그 교수님은 원래 한 분야의 권위자였는데 이제 그 분야가 사장되었으니 얼마나 안쓰럽냐는 둥, 원래 교수는 수업 스킬이 부족해도 상관없다는 둥, 학교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는 둥. 형은 소위 인싸였잖아. 술자리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학점 잘 나오고, 운동도 잘해서 학과 대표로 족구 시합도 하고, 밴드 동아리에 학술 동아리까지. 나는 형과의 단절이 큰 두려움이었기에 미안하다고 하며 형을 진정시켰어.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페이스북에서 교수님을 좋지 않게 언급한 일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형이 나에게 비난을 멈추라고 말한 것도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있잖아. 매년 같은 날에 이 모든 걸 볼 때마다 화가 나. 그때 사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왜 무려 교수님의 사정을 고려해야 하며, 내가 왜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학교에 내고 아무 불만 없이 쓰레기 같은 수업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냐는 의문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 쓰레기 강의를 들은 대가로 아직도 매달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지.
형이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꼭 봤으면 좋겠어.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한 번 들어봐. 형은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말하는 연습을 좀 할 필요가 있어. <스포트라이트>는 한 언론사의 탐사취재 팀이 어떤 성직자의 성폭행을 취재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야. 알고 보니 종교인인 가해자가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었고, 교회가 다 알고도 수년간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해. 그런데 여기서 교회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가해자를 지키려 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어. 주로 이런 식이야. 교회가 지역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지 아느냐며 비호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의 은폐 사실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법원 기록물을 공개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하니까 판사가 오히려 ‘이런 민감한 성격의 기록물을 보도하는 게 언론인의 사명일까요?’라고 되물어. 취재팀 팀장은 친구에게 자신의 상사와 자신을 편 가르기 하는 말을 듣기도 해. 탐사보도를 지시한 너의 상사는 이 지역 사람이 아니기에 이 사건을 파헤쳐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며.
나는 그 학기가 끝나고 강의 평가란에 문제점을 적어서 제출했어. 그리고 난 그 이후에 단 한 차례도 그분의 강의를 듣지 않았지. 그럼에도 교수님은 학과장이 되셨고, 연구비를 받으며 연구실에 학생들을 들이고, 꾸준히 똑같은 수업을 하셨어. 자신의 필기가 적힌 공책 한 권 가져와서 공책 한 번, 칠판 한 번 번갈아보며 베껴 쓰다가 끝나는 그 수업 말이야.
이쯤 했으면 내가 왜 형에게 영화를 추천했는지 알거라 믿어. 진지하게 감상하고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에게 답장은 하지 말아 줘. 나는 매년 반복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이 편지를 쓴 것뿐이야. 포스팅도 댓글도 이젠 모두 삭제했어. 형이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해도 좋아. 다만 억울함이나 변명을 나에게 전달하지는 말아줘. 그냥 알아서 살아. 그냥...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