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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 Apr 10. 2019

엄마와 파워포인트와 무관심

울엄마는 아들 직업이 개발자라는 사실은 알고 계신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시는 것 같다. 프로그래머 비슷한 말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프로그램 연구한다' 정도로 알고 계신다.



내가 아무리 엄마의 “힘든 프로그램 연구 그만하고 공무원 시험 봐라”는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불효자라 할지라도 명절에는 찾아뵌다. 어느 평범한 명절, 오랜만에 집에 와서 티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아들, 엄마 파워포인트 하는데 뭐가 잘 안되더라야. 니가 좀 봐줘.



눈을 거두지 않은 채 일단 끄덕였다. ‘또 웬 파워포인트?’ 생각하며 바닥에 달라붙은 엉덩이를 힘겹게 떼어냈다. 엄마는 작은 방에서 컴퓨터를 켰다. 가면서도 티비 소리에 맞춰 나는 낄낄거렸다.

컴퓨터는 부팅을 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멍하니 윈도우 로고를 보고 있다가 문득 얼마 전 엄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부팅 속도가 거의 90년대 컴퓨터급... [1]



그날 통화는 특별할 것 없었다. 아들 저녁 먹었는지, 엄마는 저녁 드셨는지, 동생은 잘 있는지, 엄마는 친구들이랑 잘 놀고 계신지, 안부를 묻고 전하는 내용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끊으려는데 마지막이 조금 뜬금없었다. 엄마는 작은 방에 있는 모니터가 켜지지 않는다 하셨다. 나는 내가 개발자라는 이유로 컴퓨터를 고쳐달라던 수많은 연락들을 떠올리며, ‘그거 그냥 수리 기사 불러요’라고 무심하게, 약간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고 그게 다였다.



어찌 된 일인지 내 눈앞에 보이는 모니터는 아무 문제없이 빛을 내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을까 갈등하는 중에 부팅이 완료되었고, 엄마는 널뛰는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여, 바탕화면에 있는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었다. 서툰 솜씨로 이런저런 기능을 테스트한 흔적들이 보였다.



사실 파워포인트로 뭔가를 만들어 본 지 오래되었다. 리눅스 명령어와 개발용 프로그램 단축키는 머리로 떠올리기 전에 손이 기억하는 정도지만, 파워포인트는 [F5]와 [Shift+F5]를 기억하는 정도였다. 무슨 기능들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아이콘에 마우스 커서 갖다 대보고 설명 읽어 보고 사용하면 되잖으냐고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엄마의 물음에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스스로 답답한 것도 문제였는데, 엄마가 나의 기분을 살피고 있는 듯한 느낌도 마음에 걸렸다. 내게는 내가 코너에 몰리면 되묻는 버릇이 있다.



엄마 근데 이거 왜 하려는 거야?
응, 이거 수료해야 이번에 승진할 수 있다더라.



모든 것이 IT로 이루어지는 세상의 뒤켠 [2]



나의 학창 시절에, 가끔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 속상하다는 말을 반복하시던. 당신보다 늦게 들어온 젊은 사람이 더 높은 직급으로 들어와 더 빨리 승진해서 서럽다시던. 공부 잘한다 소리 들었음에도 외삼촌 업어 키우느라 대학교는 생각할 수 없으셨던.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대학에 다녀 졸업장을 따내신. 울엄마,



다 알면서 나는 아직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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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 Photo by Lily Banse on Unsplash

[1] : https://www.inverse.com/article/53822-captain-marvel-90s-music-references-and-nostaligia

[2]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82910443099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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