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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 Dec 12. 2018

망한 소개팅의 계절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ㄷ....

며칠 전에 소개팅을 했다. 내가 고른 맛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상대방이 가고 싶어 했던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에게 두 번째 만남은 없었다.



애프터는 일단 신청하는 게 예의라는 말도 들어서 살짝 고민하긴 했지만, 상대방 또한 바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무례함의 걱정보다도 컸다. <하트 시그널>의 여섯 패널이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었다면 뭐라고 평했을까. 대부분이 좋은 분위기라고 진단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은 것도 맞거든.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파스타를 먹을 때면 태어나 처음으로 소개팅에 나갔던 일이 떠오른다. 상대방은 역사 관련 전공의 대학생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전공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공계인 내가 알아봤자 그 전공에 대해서 뭘 알겠나. 그 때문인지 대화가 툭툭 자주 끊겼다. 게다가 음식도 문제였다. 주문한 파스타가 내 앞에 놓였는데 왜인지 포크와 숟가락만 있었고 젓가락은 없었다. 그랬다. 당시 나는 파스타를 포크로 어떻게 먹는지 몰랐다. 포크를 이용해서 면을 앞접시로 깨작깨작 옮기기를 몇 번, 고민 끝에 나는 접시에 얼굴을 들이밀고 개념 없이 먹었고, 애프터도 물론 없어졌다.



그 뒤로 나에게 소개팅은 새로운 만남에 설레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큰 부담이기도 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주위 사람에게 배우고 자리에 나갔다. 나는 상대를 맞은편에 앉혀놓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벌레를 잡으려는 사람 마냥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림자와 치르는 복싱은 나를 방어적으로 만들었고, 내 앞에 앉은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방어 쪽으로 기울어진 천칭의 균형을 맞추려다가 반대쪽에 너무 무거운 추를 놓아버리기도 했다. 오버를 해서 흑역사를 만들기도 했고, 내 이야기만 하느라 상대를 살피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년간의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지난주를 맞이했던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떠오를만한 것이나 관심 생길법한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졌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서로가 하고 있었다. 결말을 이미 아는 연극을 애드리브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애매한 경력의 두 배우 같았다. 상대방도 느끼고 있었는지 집에 갈 때 되어서 말하더라. '소개팅 많이 해보셨어요? 소개팅이 목적성이 있어서 그런지 어려운 거 같아요.' 나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던 말을 콕 짚어서 해주었기에 오히려 그때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대화할 수 있었다. 그치만 그게 끝이었다.



Photo by Mourad Saadi on Unsplash



고개를 푹 숙이고 먹다가 왠지 모르게 싸해진 분위기에 괜히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오래전 그때, 그 맞은편의 스타벅스에는 초록색 트리 장식에 수 놓인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계절이 돌아왔다. 망한(현재 완료) 소개팅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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