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도무지 한 가지 일만 할 수 없는 사람

일 벌이는 것도 취미인가요

by 헷지호그

인턴쉽을 시작한 지도 벌써 4주가 지났다. 풀타임 인턴쉽이기는 하지만 매일 회사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와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슈퍼바이저도 알고 있다 보니 굉장히 자유롭다. 초반 몇 주의 러시가 잠잠해지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들의 얼개가 대략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나니 일이 금방 익숙해져서 벌써 내가 이 정도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체성이 필요하다는 것 안다. 내가 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걸요! 대화가 필요하다. 월요일 회사 가서 할 일 리스트에 추가: 슈퍼바이저랑 상담하기.


한 달에 최소 8일만 회사에 출근을 하면 된다. 난 웬만하면 주 2~3번 가려한다. 집에 있으면 집중도 안 되고 회사 가면 맛있는 커피랑 과일이 항상 있으니까. 가끔 다른 나라 지부로/에서 출장 다녀/오신 분들이 가져오신 세계 각국 과자들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달달한 땅콩 분태를 뭉친 것 같은 브라질 과자 맛있었다. Paçoca라고 한다지.


아침은 언제나 바나나랑 카푸치노.


예정에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바랐던 인턴쉽을 시작하게 되면서 6월 말 예정이었던 졸업을 여름방학을 넘겨 10월 말로 미뤘다. 원래대로라면 2년 만에 끝내야 하는 석사 과정에 2개월을 추가했다. 이런 걸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전에 배웠다. 스트레스에 마비되느니 내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을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았다.


참 바쁘게도 살았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1년에 4개의 쿼타일. 8주 안에 3과목을 끝내고 2주 동안 시험 및 과제 데드라인을 맞추는 정신없는 사이클을 4번 반복하면 네덜란드 공대의 1년이 끝난다. 학교만 열심히 다녔어도 기특했을 텐데 뭐가 그렇게 심심했는지 각종 조교, 파트타임 일들을 지난 5~6년간 쉬지도 않고 했다. 인터내셔널 학생 비자로 네덜란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경로는 매우 한정적이고, 적어도 내 용돈과 생활비의 일정 부분은 내 힘으로 벌어서 쓰고 싶었다. 학교는 안정적인 비자 스폰서이며 나름 높은 시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에 어떻게든 학교 내에서 일을 찾아서 했다. 그 버릇 때문인지 석사 와서도 학교 수업만 들으며 집-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왠지 뭔가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너는 학교만 다녔어도 충분히 바빴을 거란다.) 운이 좋게도 또 학교 내에서 교수님 보조 파트타임을 구할 수 있어서 1년 조금 넘게 생활비를 커버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수업 듣고 과제하고 시험을 치르는 것은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길이기에 참으로도 지난한데, 일하면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힘이 되었다. 학교 수업들이 지긋지긋해지지 않게 균형을 잘 맞춰줬지.


신기한 점은, 이 모든 것들의 기억이 굉장히 희미하다는 것이다. 무려 올해 1월까지도 과제를 하고 시험을 봤는데 다 전생 같다. 힘들고 바쁜 시기를 트라우마 수준으로 생각해서 뇌가 기억을 지워버린 건지, 아니면 내 뇌의 저장 용량이 현저히 작아서 몇 개의 기억만 살아남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일들을 역할의 단어와 과목의 이름, 가짓수로 기억하는 것 외에 세세한 잔상들이 없어 아쉽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경험치가 쌓여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소소한 성취감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게 취미 수준이 되었는지 기어이 인턴쉽까지 시작했다. 논문밖에 안 남은 학교 생활에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주 40시간을 논문만 붙잡고 있어야 했을 다른 평행 세계의 삶을 상상하면 그 세상의 나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아 보인다. 어차피 그 시간을 다 논문에 쏟지도 않았을 거다. 길어지는 낮을 따라 많이 걷고 읽고 보고 공부하고 배우자!


DD09207B-21FA-4F86-902C-748AB87B5DF5_1_102_o.jpeg 오늘 동네 산책 중 발견한 햇살에 흐드러지는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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