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벌이는 것도 취미인가요
인턴쉽을 시작한 지도 벌써 4주가 지났다. 풀타임 인턴쉽이기는 하지만 매일 회사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와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슈퍼바이저도 알고 있다 보니 굉장히 자유롭다. 초반 몇 주의 러시가 잠잠해지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들의 얼개가 대략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나니 일이 금방 익숙해져서 벌써 내가 이 정도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체성이 필요하다는 것 안다. 내가 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걸요! 대화가 필요하다. 월요일 회사 가서 할 일 리스트에 추가: 슈퍼바이저랑 상담하기.
한 달에 최소 8일만 회사에 출근을 하면 된다. 난 웬만하면 주 2~3번 가려한다. 집에 있으면 집중도 안 되고 회사 가면 맛있는 커피랑 과일이 항상 있으니까. 가끔 다른 나라 지부로/에서 출장 다녀/오신 분들이 가져오신 세계 각국 과자들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달달한 땅콩 분태를 뭉친 것 같은 브라질 과자 맛있었다. Paçoca라고 한다지.
예정에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바랐던 인턴쉽을 시작하게 되면서 6월 말 예정이었던 졸업을 여름방학을 넘겨 10월 말로 미뤘다. 원래대로라면 2년 만에 끝내야 하는 석사 과정에 2개월을 추가했다. 이런 걸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전에 배웠다. 스트레스에 마비되느니 내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을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았다.
참 바쁘게도 살았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1년에 4개의 쿼타일. 8주 안에 3과목을 끝내고 2주 동안 시험 및 과제 데드라인을 맞추는 정신없는 사이클을 4번 반복하면 네덜란드 공대의 1년이 끝난다. 학교만 열심히 다녔어도 기특했을 텐데 뭐가 그렇게 심심했는지 각종 조교, 파트타임 일들을 지난 5~6년간 쉬지도 않고 했다. 인터내셔널 학생 비자로 네덜란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경로는 매우 한정적이고, 적어도 내 용돈과 생활비의 일정 부분은 내 힘으로 벌어서 쓰고 싶었다. 학교는 안정적인 비자 스폰서이며 나름 높은 시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에 어떻게든 학교 내에서 일을 찾아서 했다. 그 버릇 때문인지 석사 와서도 학교 수업만 들으며 집-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왠지 뭔가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너는 학교만 다녔어도 충분히 바빴을 거란다.) 운이 좋게도 또 학교 내에서 교수님 보조 파트타임을 구할 수 있어서 1년 조금 넘게 생활비를 커버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수업 듣고 과제하고 시험을 치르는 것은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길이기에 참으로도 지난한데, 일하면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힘이 되었다. 학교 수업들이 지긋지긋해지지 않게 균형을 잘 맞춰줬지.
신기한 점은, 이 모든 것들의 기억이 굉장히 희미하다는 것이다. 무려 올해 1월까지도 과제를 하고 시험을 봤는데 다 전생 같다. 힘들고 바쁜 시기를 트라우마 수준으로 생각해서 뇌가 기억을 지워버린 건지, 아니면 내 뇌의 저장 용량이 현저히 작아서 몇 개의 기억만 살아남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일들을 역할의 단어와 과목의 이름, 가짓수로 기억하는 것 외에 세세한 잔상들이 없어 아쉽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경험치가 쌓여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소소한 성취감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게 취미 수준이 되었는지 기어이 인턴쉽까지 시작했다. 논문밖에 안 남은 학교 생활에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주 40시간을 논문만 붙잡고 있어야 했을 다른 평행 세계의 삶을 상상하면 그 세상의 나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아 보인다. 어차피 그 시간을 다 논문에 쏟지도 않았을 거다. 길어지는 낮을 따라 많이 걷고 읽고 보고 공부하고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