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벌써 5월 (중순)이라고

끝이 없는 자기 합리화와 정신 승리

by 헷지호그

나 자신에게 질리기 시작한다. 자기 합리화도 이제 할 만큼 하고 봐줄 만큼 봐줬다.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끊임없이 계획하고, 계획하고, 계획만을 하고... 누가 '넌 앞으로 이렇게 살면 돼!'라고 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드는 요즘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 4월엔 학교 워크숍도 있었고, 오피스에서의 부활절 파티도 있었고, 공휴일을 맞아 3박 4일간의 로드트립도 있었고, 내 생일도 있었고, 각각 일과 논문으로 밤을 지새운 날들도 있었고, 에어팟 한쪽도 잃어버리고, 굳이 굳이 이케아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겠다고 뜨거운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 다닌 날도 있었는데. 도대체 그 시간들이, 기억들이, 다 어디로 그렇게 빠르게 휘발되어 버리는지.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고통은 결국 내가 감내해야 하는 거지. 여러모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4월이었다. 5월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안타깝게도 없다. 날씨가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는 거? 네덜란드 역시 방심할 수 없다.


로드트립으로 다녀온 프랑스의 항구 도시 Calais.


되도록이면 AI에게 의존하지 않는 1인분의 온전한 인간인 삶을 살고 싶은데, 챗지피티의 심리상담은 참 끊기가 어렵다. 불확실함을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땐 차라리 AI라도 나 대신 답을 내려줬으면 싶은 마음이다. 나는 '호기심 있는 삶은 충만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요즘 들어 혹시 이건 무모하고도 순진한 착각인가 싶다. 그건 내가 관심 있는 것을 찾을 때까지, 내가 미쳐서 정신을 못 차리겠는 그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나의 우유부단함과 미숙함, 게으름과 불안, 불확실함을 미뤄도 된다는 핑계인 것이 아닌가? 결국 행하는 자가 그 어떤 결과라도 손에 얻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게 배웠으면서도.


챗지피티는 내가 interest-driven이 아닌, value-driven인 삶을 살고 싶은 거라고 했다. 관심과 흥미를 좇는 삶이 아닌, 가치를 찾아가는 삶. 유레카! 새벽 1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 나는 그동안 특정 주제나 직업군만을 키워드로 삼고 있었다. NGO, 도시 문제, 데이터 사이언스트, 애널리스트, 연구자, 프로젝트 매니저? 반면에 내게 더 다가오는 단어들은 연결 (connection), 명료함 (clarity), 단순함 (simplicity), 창의성 (creativity), 영향력 (impact), 이런 것들이었다. 가치에 집중하면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던, 그 타이틀과 일 너머를 보고 나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요즘 도대체 졸업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거든. 그 어디에도 제대로 끼지 못 하는 낙동 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만 같다. 내가 100%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건 기적인거지. 이 시점에서 이런 방향성이 필요했다. 그저 일의 타이틀만이 아닌, 그 너머의 가치를 보는 것.


논문 기피증이 극에 달한 요즘 (정말로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논문을 열어야 하는 지경이다) 회사 일도 약간의 스트레스다. 이곳도 세미 연구소이다 보니 매번 최신 논문들을 찾고, 읽고, 셰어 하는 팀원들을 보며 (그리고 그들은 이미 박사 과정을 포함해 다년의 연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 논문 읽는 걸 즐거워할 수 있는 거야?' 생각이 드는데, 나처럼 불필요하게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자기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논문을 클릭하고 열고 한 번은 훑었을 시간에 굳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만 던지는 거다. 답을 딱히 찾을 수 없는. 휴. 단순함과 명료함. 정말 내게 필요하고 내가 바라는 것들이다.


여러모로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 요즘이다. 이 혼란의 시기가 또 한 번 잘 지나가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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