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나랑 잘 살기 위해서는

식물을 키우자

by 헷지호그

올해 갈수록 흐려지는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불안감, 열등감, 찌질함, 자책 등의 내 구린 부분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들을 많이 보냈다. ‘완벽’이라는, 기준조차 불분명한 이상이 허상과 더 가깝다는 걸 알아차린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완벽한 건 없다’라는 이 클리셰를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어보면 참 많은 것들을 동시에 하고 있으면서 그중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 뭔지 아시나요? 인턴도, 논문도, 부가적인 일들도… 그 무엇도 자랑스럽게 “제가 했어요!”라고 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봄 끝자락부터 심리 상담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름 끝자락 즈음에 이 혼란스러움이 좀 제자리를 찾았다. 여름 내내 김혜리 기자, 이동진 평론가, 박정민 배우의 목소리를 bgm 삼아 나를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여전히 부유하는 기분으로 해 나갔다. 정말 천천히. 무언가 생명력 있는, 손에 잡히는 일이 필요해서 (동물과 함께할 여건은 안 되니) 식물을 더 들이기 시작했다. 이 친구들도 다 각자의 때가 있더라. 죽은 줄 알았던 아보카도가 여름 끝자락에 새 잎을 내기 시작하고, 겨울-봄 내내 잠잠하던 다육이가 햇살이 뜨거워지니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컸다. 나도 내 때가 있는 거겠지. 햇빛과 바람, 물과 관심으로 쑥쑥 커가는 반려식물들을 보며 나도 나를 잘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당한 애정과 꾸준한 들여다봄. 나는 평생 나랑 살아야 하니까. 나랑 잘 살아야지.

11E3FDEA-E0D9-4EC6-AE89-3D807BAFAC6D_1_105_c.jpeg 아보카도
6D282E3F-0971-428D-99F6-37748ACC0A6F_1_105_c.jpeg 책상에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풍경


778611ED-7579-4B94-8597-9650C09D8AC5_1_105_c.jpeg 반려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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