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by 히다이드

비행기 탑승구에서 러시아인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동안 갈고닦은 러시아어를 써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들어가면서 유창한 러시아어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혀가 꼬이는 바람에 그만 입 안에서 웅얼거리고 말았다. 그 사이에 승무원 중 한 명이 영어로 비행기표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버벅거려서 한동안 탑승구를 가로막고 있어야 했다. 급하게 가방에서 표를 꺼내 보여주고 나서 객실로 들어서자 다른 승무원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맞이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깔끔한 시작은 아니었다.


복도를 따라 내 자리로 걸어가는데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었다. 탑승장과는 달리 시끌벅적했다.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언제나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소수인 공간에 있다는 것이 어색했다. 승객들의 탑승이 끝나고 한 승무원이 앞에서 비상 탈출 요령을 설명한 후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 땅 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구름 위의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내 자리는 창가가 아니었다. 그래도 창밖 풍경은 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창가에 앉은 외국인이 햇빛 들어오는 게 싫다고 창문 가리개를 내려버렸다. 복도 건너편에 있는 창문을 통해 비행기 밖 풍경을 봐야 했는데 잘 보이지가 않았다. 창밖을 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표시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음료수와 샌드위치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인터넷에서 오로라 항공이 제공하는 샌드위치가 맛이 없다는 후기를 읽고 걱정을 했었는데, 연어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는 약간 짜긴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아마 이것보다 훨씬 맛이 없는 샌드위치가 나왔어도 다 먹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뭐가 나오든 우걱우걱 먹어 치워 주마하고 얼마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한 러시아 비행기는 북한 상공을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갔다. 높은 하늘이긴 하지만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휴전선을 넘어 평안남북도와 함경도를 가로질러 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어 교재를 펴놓고 보면서 갔는데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그 땅, 러시아로 들어선 것이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실내등이 꺼지고 나서 얼마 뒤에 약간의 진동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활주로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색깔의 나무들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배경에서 활주로에 늘어선 군용기들을 보고 있자니 외국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이 자꾸만 생각났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신호가 들어오고 기장의 안내 방송이 끝난 후에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