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만난 아주머니

by 히다이드

비행기에서 내리자 인천공항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탑승 게이트 앞 의자에 조용히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던 러시아인들은 분주하게 자기 길을 가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짐을 찾을 수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출발 전에 조사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짐을 찾는 부분을 놓쳐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쫓아가 보기로 했다. 앞에서 빨리 걷고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쫓아가 보니 출입국 심사를 하는 곳이 나왔다. 부스가 여러 개 있고 부스 안에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앞에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삼엄했다. 심사를 받는 사람들도 경직돼 보였고, 제복을 입은 심사관은 고압적인 표정으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도 한 여자 심사관 앞에 섰다. 무서운 사람처럼 보였는데 다행히 나에게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날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조그만 종이를 주면서 입국일과 출국일, 이름, 여권 번호 등을 적으라고 했는데 양식대로 적어서 주자 컴퓨터로 이것저것 조회한 후에 쾅하고 도장을 찍어줬다. 조용한데 도장 찍는 소리만 크게 울리니까 괜히 더 위축되는 것 같았다.


심사대를 통과해서 바로 앞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여권에 찍힌 도장을 감상했다. 분홍색 잉크로 찍힌 도장 한가운데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날짜 오른편으로 '<'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위로 비행기 그림과 함께 키릴 문자로 러시아라고 써진 게 보였고 밑에는 블라디보스토크라고 적혀있었다. 내 여권에 러시아 입국 도장이 찍히게 될 줄은 몰랐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 밑에는 사나운 눈매를 가진 건장한 남자 셋이 서 있었는데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경찰들처럼 보였는데 괜히 긴장해서 그 앞을 지나갔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까 바로 앞에 비행기 수화물을 찾는 곳이 있었다. 혹시라도 내 배낭과 캐리어 가방을 다른 놈이 집어갔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배낭과 캐리어 가방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무사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배낭을 열고 다시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난 입국 수속도 끝나고 짐도 찾았으니 서두르지 말자고 생각하고 공항 청사 안에서 휴대폰 SIM 카드를 산 후에 천천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 청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 가는 기차는 운행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청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마침 한 러시아인 아주머니가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몇 달 동안 갈고닦은 러시아어를 써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고 싶다고 말을 걸었다.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는 말과 함께 잘 못 알아듣는 나를 위한 약간의 몸짓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보여준 반응은 내가 기대하던 게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꾸 무슨 상황을 러시아어로 설명해 주는데 내가 겨우 알아들은 건 러시아어 숫자 5 뿐이었다. 계속 못 알아들으니까 아주머니가 나를 버스 시간표가 적혀 있는 표지판으로 데리고 갔다. 시간표를 보고 나니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오후 5 시에 버스가 있는데 내가 10 분 정도 차이로 버스를 놓친 것이다. 다음 버스는 6 시에 있었고 한 시간 가까이 밖에서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같이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가 뒤늦게 이해됐다. 내가 휴대폰 SIM 카드까지 사면서 여유를 부리는 동안 사람들은 기차가 됐건, 버스가 됐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수단을 찾아서 먼저 출발한 것이다.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하고 기다릴 채비를 하는데 아주머니는 걱정이 됐나 보다. 뭐라고 얘기해 주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근처에 있던 택시 운전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더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택시 운전사의 뒤에 있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니 얼굴을 찡그리며 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운전사와 싸움이 붙을까 봐 직접 말로는 못하고 얼굴만 찡그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서 택시 운전사에게는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다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아주머니가 타고 갈 버스가 도착했다. 아쉽지만 헤어질 준비를 하는데 이 아주머니가 버스 운전사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나한테 오라고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버스에 타란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어서 타라고 손짓을 해서 나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이 아주머니께서 버스에 이미 타고 있던 다른 러시아인들을 모아서 한바탕 소란스럽게 얘기를 하더니 나보고 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남자를 따라가라는 거였다.


잠시 후에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안은 전부 다 러시아인들이었고 나 혼자만 동양인이었다. 많이 불안했는데 아주머니가 간간히 나를 돌아보며 안심시켜 줬다. 버스는 자주 멈춰 섰다. 작은 마을이 나올 때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정차했는데, 정류장 몇 개를 지나고 나니 25 인승 버스가 사람들로 꽉 차서 서서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처음엔 앉아서 가다 나중에는 나이 드신 분이 타셔서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갔다.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동양인은 예의가 없다고 할까 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갔는데 아주머니가 가리켰던 남자가 날 돌아보더니 곧 내릴 거라는 몸짓을 했다. 짐을 챙기기 시작했는데 버스비가 얼마인지를 몰랐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얘기하는데 그중에 한 아주머니가 말하는 50이라는 숫자를 간신히 알아듣고 버스비를 낼 수 있었다.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머니에 있는 현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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