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리자 아주머니가 가리켰던 남자와 그의 동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바쁜지 거의 뛰듯이 걸었다. 이 사람들을 믿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쫓아갔다.
쫓아가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외곽 지역처럼 보였다.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왕복 4차선 도로 위로 차들도 제법 다녔고 주택과 상가들도 많았다. 러시아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됐다는 것 때문에 흥분됐지만 여유롭게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서둘러서 차도를 건너는 두 사람을 따라 나도 뒤질세라 정신없이 달려서 차도를 건넜다. 그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달렸는지 모르겠다.
길 건너편에는 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터미널 건물을 가로질러 한 버스 앞까지 달려갔는데 앞서 달리던 두 사람은 버스 입구에 도착해서야 멈춰 섰다. 거기서 한 사람은 다른 버스를 탄다며 갔고, 아주머니가 처음에 가리켰던 남자와 나만 그 버스를 타게 됐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후에 버스가 출발했는데 나도 그렇지만 그 사람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처음엔 둘 다 말이 없었고 얼굴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는데 남자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유창하진 않지만 영어로 얘기하는 걸 보고 속으로 놀랐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군복 비슷한 허름한 옷차림에 흙이 묻은 지저분한 등산화, 낡은 더플 백을 메고 있는 덥수룩한 머리의 남자를 보며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한국 어디 출신이냐, 직업은 뭐냐 등과 같이 간단한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는 한국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얘기하면서 수첩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로 얘기하다 소통이 안 될 때 수첩 위에 간단한 단어를 써서 보여주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열심히 수첩을 주고받았지만 해석하는데 시간이 걸리다 보니 주고받은 횟수에 비해 많은 것을 얘기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수첩을 주고받는 동안 뒤에 앉아 있던 다른 러시아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버스를 갈아탄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었다. 다시 교외로 빠져나간 버스가 몇십 분을 더 달리고 나자 창 밖으로 큰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진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남자와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의 한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스산한 날씨였다. 거기에 무슨 먼지가 그렇게 많이 날리는지 남자와 같이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자꾸 눈에 뭐가 들어가서 손등으로 눈을 비벼야 했다. 10 분 좀 넘게 기다렸던 것 같다. 마침내 우리가 탈 버스가 들어왔다. 버스 안에서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남자가 내 이름이 발음하기에 불편하다며 영어 이름은 없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면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잠시 동안 생각하던 남자가 나보고 수첩을 달라고 하더니 수첩 위에 영어로 ‘Den’이라고 적었다. 영어 이름까지 지어준 게 고마워서 앞으로 이 이름을 쓰겠다고 남자에게 몇 번이나 약속했다.
버스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들어서자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는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수첩에 적어놓은 숙소 주소를 보여줬는데 남자는 알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날 안심시켜 줬다. 몇 정거장을 더 간 후에 남자가 내릴 때가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부리나케 짐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남자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나보고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자기 목적지가 따로 있을 텐데, 어떻게 가면 된다고 방향만 알려줘도 충분히 고마운 일인데 이 남자는 나를 숙소 바로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고 자기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면서 문제가 생기면 전화하라는 말까지 해주고 나서야 자기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이름은 앤드류였다. 공항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와 앤드류에게 내가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