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역 바로 옆에 러시아 고속열차 ‘삽산’의 출발역인 레닌그라츠키 역이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역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놓고도, 횡단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혹시 몰라 한 번 더 구글 지도 검색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엉뚱한 역으로 갈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고 안도하며 그 엉뚱한 역으로 가려고 지나가던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택시까지 불렀는데, 트렁크에 캐리어 가방을 싣고 자리에 앉아 “삽산”이라고 말하는 순간 택시 기사님이 바로 옆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삽산을 타는 역은 모스크바 역 바로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황해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내리려는데 이번에는 택시를 불러준 현지인이 당황하면서 주차료로 100 루블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를 태우기 위해 주차장에 잠시 택시를 세워놨었는데 그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타지도 않은 택시의 주차비를 내라고 하니 아깝기도 하고 약간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운전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100 루블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릴 때 옆에서 도로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웃으면서 옆 건물을 가리켰다.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고 역으로 걸어갔다.
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현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거리의 모습을 둘러봤다. 오후라 그런지 약간 한산한 느낌의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장소에 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약간 겁이 났다. 오는 길에 좀 더 자세히 보자고 다짐하며 역 안에 들어섰다.
삽산의 승강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한테 물어가며 승강장을 찾아갔는데 열차를 제 때에 무사히 탈 수 있을지가 걱정됐다. 혹여 시간을 잘못 계산해 열차를 놓칠까 봐 출발시간보다 1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열차가 한 대 들어왔는데 시간을 보니 내가 탈 열차가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옆을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맞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데 아주머니의 대답은 그 열차가 아니라는 거였다.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플랫폼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열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물어본 아주머니도 열차에 탔는데 잠시 후에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매점에서 뭘 사 가지고 오려는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역무원에게 뭔가를 물어본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 열차가 맞다고 하는 것이다. 하마터면 눈앞에서 내가 탈 기차를 그대로 보내버릴 뻔했다. 늦게라도 아주머니가 다시 얘기해줘서 다행이었다. 마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열차에 타고 있었는데 그 틈에 섞여 나도 열차에 올랐다. 내가 타고 가는 열차칸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내 옆자리에도 중국인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도 전부 중국인이었는데 서로 다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때 본 중국인들 중에서 한 어르신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탁자가 있는 자리에 앉아 옆자리의 아내가 차려주는 차와 간식을 먹으며 맞은편의 젊은 남자와 얘기를 하는데, 느릿느릿한 말투로 뭔가를 물어보면 맞은편에 앉은 젊은 사람이 공손히 답하는 식이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가 있고 부유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며 창밖으로 자작나무 숲도 보고, 삽산의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고 좋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그 어르신의 약간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기품이 아직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2 시간 조금 넘게 달려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로 바쁘게 걷기 시작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부터 고민하다 보니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역 맞이방으로 나와서 건물 출구부터 찾았는데 출구들이 전부 지하도와 연결돼 있어서 어디로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허름한 행색에 출구를 찾아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수상해 보였던 것 같다. 경찰들이 와서 날 불러 세웠는데 내 표를 확인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도 잘 몰라서 ‘여행자’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어떻게 그 상황을 빠져나갈지 고민했는데 수첩에 적어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숙소 주소를 보여주자 그제야 의심을 풀었다. 내친김에 숙소에 가려면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를 물어봤는데 경찰관 중 한 명이 지도까지 그려가며 친절히 설명해 줬다. 알려준 대로 따라가자 출구가 나타났는데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역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생기가 넘쳤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맞은편 가게에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뭔가를 홍보하는 게 들려왔다. 우리나라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홍보하는 가게들을 본 적이 있는데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라 그 모습이 특이하면서도 재밌어 보였다.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안전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숙소까지 2 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최대한 빨리 걸을 생각이었다. 급하게 걷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섰는데 네프스키 대로가 나타났다. 눈이 부셨다. 석양을 받아 거리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그 황금빛 석양 한가운데로 캐리어 가방을 밀며 정신없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