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 두면 힘이 된다 - 둔필승총
열 살 무렵 KBS2 텔레비전으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보았다. 텔레비전 만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이었다. 당연히 만화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쓴 내용에 나름대로 상상력을 덧입혀 장면들을 그려보곤 했는데, 만화의 영상은 앤과 초록색 지붕 집, 에이본리 마을에 대한 내 머릿속 그림과 충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만화를 끝까지 보기가 어려웠다. 만화의 특정 대목 - 앤이 시를 낭송하거나 연극의 대사를 읊는 장면 - 에 이르면 발끝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앤의 충만한 감수성이 화면을 뚫고 내게 전해졌던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런 장면을 만나곤 했지만 가늘게 뜬 눈으로 활자를 빠르게 지나치며 앤의 감정을 적당히 덜어낼 수 있었다. 반면, 감정이 듬뿍 들어간 성우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텔레비전 앞에서 나는 몸서리를 쳤고 어딘가를 벅벅 긁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으면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학교의 동료 강사님이 유튜브에서 <빨강머리 앤>을 다시 보셨는데 무척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힘입어 30년 전 실패했던 난제에 재도전해 보기로 했다. 전체 50회 분량 중 34회까지 보았으니 이번 정주행은 성공할 것 같다. <빨강머리 앤> 을 보면서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앤의 시 낭송을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사십 대 중반, 대충 계산해도 5만 공기의 밥을 먹었을 테고 그만큼의 나이를 함께 먹어 불혹을 통과했더니 사랑니 발치한 자리에 ‘그러려니’가 생긴 것일까. 화들짝 놀랄 일도 식식대며 흥분할 일도 없는 상태가 되어 세상을 관조하는 경지에 오른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제도 무례한 식구들에게 짜증이 났고 성실하지 못한 학생들의 모습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퇴근을 했으니까. 앤이 낭송하는 시와 희곡의 대사 그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오오, 아아 같은 감탄사가 거슬리지 않았다. 어려서는 앤이 추구하는 낭만이 낯설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낭만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모아 눅눅하고 무거운 일상을 덥히는 작은 모닥불로 쓰고 싶어졌다.
앤에게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건네는 마릴라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낯설지 않은 캐릭터였다. 어려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마릴라의 말속에 담긴 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내가 앤처럼 수다스러운 딸을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34회 에피소드 <시험공부>편에서 앤은 ‘영혼의 벗’인 다이아나가 앤과 함께 퀸 학원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을 하고 급기야는 다이아나와 다투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릴라는 앤에게 딱 잘라 말한다. “앤, 네 결점은 말이다, 매사를 자기 멋대로 생각해 버리는 거야. 니가 너무 졸라대니까 다이아나는 그만 솔직한 자기 기분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앤은 마릴라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본다. 다음 날, 앤과 다이아나가 영혼의 벗이 되기로 맹세했던 수선화 꽃밭에서 앤은 다이아나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두 사람은 맹세를 갱신한다. 서로 다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라도 서로를 이해해주는 게 진정한 마음의 벗임을 깨달은, 성숙한 맹세였다.
앤이 ‘영혼의 벗이라면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있었다면 다이아나와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릴라의 말마따나 각 개인은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생활 방식을 찾으며 나갈 뿐이고 아무도 자기의 생활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 각자의 인생에 대한 답은 각자가 찾을 뿐, 내 답이 남의 답이 될 수 없다. 머리로는 분명하게 아는 이 사실이, 생활 속에서는 생각과 달리 잘 구현되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가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간혹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반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춘 어른이 되고 싶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어른은 피하고, “니 결점은 말이다”로 시작하는 어른은 가까이하고 싶다. 그 어른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나보다 어른인 것이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