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틈나는 대로 편지나 엽서를 쓴다. 이메일도 좋아하지만 편지만 못 하다. 적당한 종이를 골라 필기감이 좋은 펜으로 한 자씩 적어 내려가는 과정을 즐긴다. 편지를 써서 집 앞 우체국에 들고 가는 시간을 사랑한다.
편지는 수신인에게 묶어 보내는 내 시간이다. 그 몇십 분 동안 나는 오직 편지의 수신인만을 생각한다. 내 말을 적지만 그 말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에 나의 말인 동시에 그의 말이기도 하다. 그를 향한 말이므로 다른 사람은 끼어들 틈이 없다. 편지의 서두나 말미에 그와 가까운 이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가 존재하기에 언급될 뿐이다.
원래 이번 겨울방학에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작문 지도에 관한 글 목차를 잡아두었고 방학 내내 원고를 써서 2월 말에는 초고를 완성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아이들의 아침과 점심, 저녁을 차려주는 것, 오직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빵 반죽처럼 두 배가 된 방학을 맞을 줄 몰랐다. 두 배의 방학은 지루하고 답답했다. 기나긴 방학에 예상치 못한 일이 또 일어났다. 일전에 써 두었던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는데 가능성이 있다며 고쳐 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글을 고치면서 내가 얼마나 일방적인 저자였는지 깨닫게 될 줄 몰랐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로 시작되는 행운의 편지가 아닌 한, 나는 편지의 수신인을 알고 수신인도 나를 안다.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는 안다. 그렇게 아는 부분은 편지에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나의 문장에 깔린 생각과 의도를 편지의 수신인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수신인은 나를 알기에 그 문장의 의미 또한 얼추 짐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글도 편지도 아닌 정체불명의 괴물이 되어 버린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은 편지를 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매일 문장을 엮어나가고 싶었다. 편지를 쓰면서 괜찮은 문장을 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편지 쓰기는 나의 글쓰기에 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능하면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귀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어도 듣지 못했다.
식탁 끄트머리에 앉아 원고 수정을 하면 딸은 최대공약수 문제를 설명해 달라고 하고 막내는 부루마블을 하자고 했다. 학원 수업 시간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 하는 큰아들 밥상을 차리면 뭘 고치고 있었는지 가물가물해질 때가 많았다. 그래도 고쳤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이 되는 과정은 품이 꽤 들었다. 가볍고 길지 않은 원고였는데도 그랬다. 애초에 잘 썼으면 이런 생고생을 덜 했겠지 싶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3년 전에 쓴 초고는 지금 고치고 있는 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하고 산란했다. 매일 식탁 끄트머리에서 보낸 시간만큼씩 글은 좋아졌다.
사흘 전, 출판사에서 보내준 메일을 받았다. 메일에 대한 답신으로 첨부된 출판 계약서에 넣을 인적사항을 적어 보냈다. 그것으로는 못내 아쉬워서 어제 편집자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편지 쓰기에 익숙했던 나의 글쓰기 습관을 고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았다. 나는 여전히 편지 쓰기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편지를 쓸 것이다. 또한 편지처럼 진솔하고 내밀하되 편지는 아닌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