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뭐라도 하나 해 먹으려면 파가 있어야 한다. 마늘은 다져서 냉동실에 넣어놓았기 때문에 자주 사지 않지만 대파는 적어도 두 주일에 한 번은 사야 한다. 길 건너 야채 가게는 집 앞 마트보다 확실히 싸다. 특히 대파는 반값이다. 마트에서 파는 대파 한 단은 2천 7백 원인데 길을 건너가면 1천 3백 원이 된다. 길만 건너면 반값이 되는 대파를 사기 위해 건널목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린다. 그 짧은 시간에도 귀찮음이 몰려온다. 그냥 집 앞 마트에서 살까? 천 원 아낀다고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 굳이 길을 건너가야 할까? 생각은 꼬리를 문다. 시켜 먹어도 되고 반찬가게에서 사다 먹어도 되는데 꼭 밥을 해야 할까?
작년 말부터 이어진,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방학은 주방을 식당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침, 점심, 저녁에 간식까지 차려낸 지 삼 개월째다. 최근에는 세 아이의 삼시 세끼에 회식과 접대가 없어진 남편의 저녁도 차리게 되었다. 엊그제 해 먹었던 메뉴를 또 해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0킬로그램짜리 쌀 포대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일주일에 한 번은 대파를 사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 쉴 틈 없이 근무하는 의료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나름의 고초를 겪고 있다. 일은 하지 못하고 대신 끝없이 밥을 해야 하는 상황이랄까.
어제 점심으로 돈가스를 튀겼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오전에 쓰던 글에 집중을 하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는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이 슬그머니 들어앉아 있었다. 좀 피곤해서 잠시 자리에 누웠는데 눈을 떠 보니 네 시 반이었다. 오전 내내 쓰던 글의 맥락은 전기밥솥에서 올라오는 김처럼 흩어졌다. 아무것도 못하고 다시 저녁 메뉴를 준비할 시간을 맞다니, 허탈했다. 그 늦잠만 허탈한 건 아니었다. 지난 주말, 책을 내기로 한 출판사 대표님의 연락을 받았다. 지금 상황에 책을 내려니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틀린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간을 미루기로 했다. 잘하는 건 별로 없어도 기다리는 건 너끈히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맥이 빠졌다.
오늘 아침, 막내에게 달걀과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작업실에 왔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썼던 새 원고를 인쇄했다. 하루에 한 문단밖에 쓸 수 없던 날도 있었는데, 모아놓고 보니 분량이 꽤 되었다. 두세 장을 마저 쓰면 초안은 다 되는 셈이다. 내일도 또 써야지. 다섯 시에는 길을 건너서 대파를 한 단 사려고 한다. 매 끼니마다 대파를 썰어 넣어 아이들을 든든히 먹이고, 그러다가 파통이 비면 또 길을 건너가 대파를 사 올 것이다.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 외에는 이 시기를 보낼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다 보면 조용히 곁에 다가온 봄처럼,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나는 글을 쓰는 나날이 돌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