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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May 21. 2021

<날아라 슈퍼보드>가 순간을 회상하게 해주었다

아버지, 동생과 함께 보내던 소중한 시간들

비 내리는 지난 주말 오후,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돌려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하여 추천 영상으로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가 뜬 것이다.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나쁜 짓을 하면은~"으로 시작하는 경쾌한 선율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일순간에 19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날아라 슈퍼보드>에 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날아라 슈퍼보드>는 늘 정해져 있는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걸 유독 좋아하셨다. 아버지 시절에는 어렸을 적부터 목욕탕을 다녔던 만큼, 주말이 되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해야 제대로 씻는 기분이 든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나와 동생도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고,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요일 루틴 중 하나가 되었다. 일요일 오전에 동네 목욕탕에 가면, 늘 보던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으레 마주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건네며, 목욕의 시작을 알린다. 


아버지와 함께 가볍게 몸을 씻고, 온탕에 들어가서 앉은 후, 마치 명상을 하듯 그 순간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물이 뜨거워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온수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몸과 하나가 되는 듯한 기분을 절감한다. 그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온탕에서 몸을 불리고 나면, 불한증막 사우나로 들어간다. 그 순간부터는 진정한 열(熱)과의 싸움이다. 냉수를 흠뻑 적신 수건을 갖고 들어간 뒤, 얼굴을 뒤덮는다. 문 옆에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 열과의 전쟁, 시간과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칸에 있던 모래가 아래로 모두 흘러내리기까지 정확히 몇 분의 소요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위칸이 텅 비어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바탕 자신과의 싸움을 하다 보면, 승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패잔병이 되기도 한다. 이기는 날에는 괜스레 기분이 좋다. 온탕과 사우나에서 몸을 충분히 불린 만큼, 이제는 세신(洗身)의 차례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셋은 세신사가 된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때수건으로 나와 동생의 몸을 밀어주시고는 하였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목욕을 시켜주고 나면, 나와 동생이 있는 힘과 없는 힘을 모아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다. 우리가 제아무리 등을 밀어도 아버지의 손 힘에는 한참 모자라서,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리 시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던 만큼, 지나서 생각해보면 한없이 소중하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욕탕을 나오면, 시원한 공기와 맞닿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어쩔 때에는 욕탕 밖이 너무 추운 나머지, 안에서 몸을 닦고 나가기도 하였다. 항상 그즈음이면, 탈의실 한편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송해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국노래자랑>이 방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네모난 박스 안에서는 저마다의 사연이 전달되며, 이야기가 존재하고, 목소리와 선율이 흐른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향의 근원인 목욕탕 표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며, 옷을 입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노래를 만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전국노래자랑>을 그렇게 챙겨보던 시기는, 아버지와 목욕하러 갈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항상 목욕을 한 우리에게 바나나맛 우유를 사주시고는 하였다. 이따금씩 3.4우유를 마시기도 하였고. 목욕을 마치고 나서 마시는 우유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아무리 잘 만든 우유를 마셔 보아도, 그때의 맛이 안 난다. 우유의 맛은 지금이 더 뛰어날지 몰라도, 추억이 담긴 맛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그렇게 우유를 마시며, 귀가를 한다. <전국노래자랑>이 끝나기 전까지 집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날아라 슈퍼보드>를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다. 그렇게 만화를 보고 나서는, 행복한 기분을 고이 안고 낮잠에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인하여 까마득히 잊었던 시간과 순간을 회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회상할 수 있도록 이렇게 글로 옮겨 놓는다. 일종의 기록이라면, 기록이다. 우리는 살아오며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순간을 경험하고, 겪는다. 한 개씩 낱으로 셀 수 있는 물건의 수효로 따지면, 몇 만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였다면, 어떤 계기에 의하여 떠올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잃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행복을 글로 옮겨야만 하고, 오늘도 쓴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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