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지나간 날들보다 현재가 중요하고 다가올 미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도전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던 내가 지나버린 날들을 되돌아보며 이 글들을 쓰는 작업은 내게 무척이나 힘든 일인가 보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우울감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울고 또 울었다. 거기에 명절준비 문제까지 나를 괴롭혔다. 얼른 정신 차려야지. 명절은 자꾸만 다가오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를 해야 했다. 이렇다 저렇다 결정을 해주지 않는 남편에게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장문에 카톡을 보냈다.
"요즘 당신이 나를 위해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널고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매번 갈 때마다 마지막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엄마를 나는 아직 보낼 준비도, 보내고 싶지도 않아요. 나를 위해 해준 것도 없고,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해도, 내가 지금 이날까지 당신과 내 아이들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낳아준 것만으로 감사해요. 언제부터 효녀였다고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내방패가 되어 오롯이 38년 동안 함께 한 아내를 위해 내 뜻을 존중해 주었으면 해요. 내 맘이 이러한데 웃으며 형제들 위해 음식장만하고 병석에 누워 있는 엄마 아랑곳없이 조상들 위해 음식 차리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이번일로 당신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답장은 간단했다.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당신 맘 헤아려 보도록 할게"
다음날 남편은 약간에 음식을 준비해서 동생들과 산소에 다녀오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카톡을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나까지 산소에 가야 한다니. 나하나 때문에 차례 상 못 올리는 것도 모자라, 조카들 세배드리는 자리도 무산시킨 마당에 무슨 낯으로 조상들 산소에 가란 말인지. 내게는 염치없고 커다란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밖에 생각해 주지 못하는 것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남편은 동생들에게 어렵게 양해를 구했을지 몰라도 내가 산소에 갈 바에는 차라리 모두 제자리로 돌리고 싶었다. 억지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너무 화가 나서 명절음식 나 혼자 다 준비할 테니 모두 집으로 와서 전처럼 차례를 지내라고 했다. 결국 큰소리가 오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2023년 1월 18일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이하였다. 며칠 전부터 혈압이 떨어지고 열이 난다 해서 걱정했는데 , 산소포화도까지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요양병원의 권유에 따라 병원 응급실로 옮겨지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명절은 다가오고 날씨마저 추워지는데 엄마는 서둘러 가시려 하고. 우리는 또다시 엄마가 가고 싶은 길을 한사코 막을 수밖에 없어 미안했다. 가녀린 엄마가 이렇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 그깟 명절 문제로 속상해하고 있었다니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도피처럼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허름한 마당 깊은 집에서 시작했지만 항상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구슬을 꿰고 뜨개질을 하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드는 부업 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빵집에서 알바를 하고 슈퍼에서 요구르트를 진열하고, 의류매장에서 파트타임을 뛰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건강했고 나에 미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고 내 아이들만큼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나는 방송대를 졸업하면서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나만 혼자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조용히 가정을 선택했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원하는 만큼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딸은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전공이지만 졸업도 전에 취업이 되었고, 아들 역시 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바로 취업을 선택했다. 잠시 꾸었던 나에 꿈이 사라지긴 했지만 내 노력만큼 아니 우리 부부의 노력만큼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해 준 덕분에 지금에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를 핑계로 투쟁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난 언제나 모든 상황을 적절하게 포용하고 내가 노력한 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 시간들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서럽기도 했지만 이도 지나갈 일이다.
이번 설명절 문제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기분으로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둘째 동서는, 산소에 가는 차 안에서 연신 "아주버님 멋지시다" 형님을 위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느냐며 대단하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가부장적이고 아직도 차례나 제사에 진심인 남편 입장에서는 힘든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난 조용히 포와 술, 과일 등을 챙겨서 산소에 다녀왔다. 물론 나로 인해 세배를 하지 못한 조카들에게 항상 해오던 것처럼 세뱃돈과 졸업축하금을 손편지와 함께 동서들에게 들려 보냈다. 그래 나 하나만 조용히 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유난히 마음이 고단했던 영원히 잊지 못할 23년 겨울의 설 명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