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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r 10. 2023

봄날의 초대

작정하고 심심하기로 했다

창가로 스며드는 봄 햇살에 몸은 나른해지고, 더 이상 노트북 앞에서 끄적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나가보자. 운동도 하지 말고 흐느적거리며 아주 천천히 엄청 심심한 사람처럼 놀아보기로 했다.


나가기 전에 음료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주말에 5분 거리에 있는 수변공원에 남편과 함께 산책을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에 시원한 음료들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한낮에 쏟아지는 햇살에 살짝 땀이 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집 앞 카페에서 3,900원이면 한잔 살 수 있지만, 마침 모든 재료가 있기에 집에서 에이드를 만들기로 했다. 며칠 전에 사다 놓은 국화&유자차가 있고, 딸이 사다준 탄산수도 있다. 그리고 주말에 약간 더웠던 터라 바로 얼려둔 얼음도 있다. 거기에 하이라이트! 남편이 친구들과 식물원에 갔다가 받아온 애플민트가 있다.  식물 키우는 재주가 꽝! 인 내손에서 1년이 넘도록 잘 자라고 있으니 재료가 완벽하다. 카페에 가면 고작 2~3장 올려주는 애플민트를 듬뿍 올려 "희야표" 에이드 완성!




수변공원 주변은 카페성지로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과, 분수광장에는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평일인 오늘은 텅 비어 심심하게 놀기로 한 나에겐 딱!이다. 광장을 지나 천변으로 내려가니 운동을 나온 사람도 몇 없어 부딪칠까 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에이드 한잔 들고 봄 살을 이고, 오직 살랑이는 바람과 하늘과 봄을 부르는 물소리를 따라 걸었다. 열심히 자맥질을 해대는 오리들이 있는가 하면, 어~ 내가 본 적이 있었나 싶은 이상한 자세로 서 있는 오리를 보고 갑자기 나태주 님에 "풀꽃"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 상황에 왜 이 시가 떠올랐을까. 오리가 목을 돌려 등에 얹고, 자고 있는 건지, 쉬고 있는 건지, 오늘 그렇게 자세히 본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내가 워낙 급하게 분주하게 사느라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아~ 오리들은 저렇게도 자는구나. 심심하게 놀기로 한 나에게 오리들은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바라볼 수 있는 긴 시간을 내주었다.  




모선배가 내게 말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너무 바쁘게 열심히 사는 거 같다고. 그때는 내가 선택한 일들이고 그것을 잘 해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그 말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여유가 생기니, 그 말을 왜 했는지 게 되었다. 50대 전후였으리라 첫 번째, 뒤늦게 시작한 공부를 하면서 과 임원으로 스터디일정을 짜고, 엠티, 체육대회 등을 준비하며,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밤잠 줄이며 공부를 했다. 두 번째로는 통장협의회 총무로 늘 종종거리다 못해 뛰어다녀야 했다.  세 번째, 학생상담봉사자 임원으학기 중엔 집단상담수업을 들어가야 했고, 누군가 펑크를 내면 대신 초, 중, 고 가리지 않고, 몇 학교씩 들어가야 했었다. 그뿐인가 7남매인 형제들 생일과 제사, 명절 등을 챙기면서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잘 해내려고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정리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기로 정한 것이 있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첫 번째가 통기타이다. 나만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심 끝에 선택했지만 절대 스트레스받지 않고, 잘하려고 하지 말고, 진도가 나가건 말건 신경 쓰지 말기 등. 가르치는 강사님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일이겠지만, 어차피 내가 기타리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그저 가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몇 곡 칠 수 있으면 그거로 충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아리라서 코로나 전까지는 회원들 틈에 살짝 묻어서 작은 음악회나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등에 연주봉사를 갔었다.


두 번째로는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기는 하다. 하지만 엄마에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글을 쓰는 것은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이렇게 가끔 일탈을 해 보면서 충전을 한다. 문제는 쓰다 보니 자꾸 이것도 써보고 싶고, 저것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냥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끄적이고 끄적이다 보면 하는 날이 오겠지. 아주 천천히 가 보려고 한다.




어쨌든 심심하기로 한 나에 산책길에서 어느새 마른풀숲을 헤치고 올라온 쑥과 냉이, 연둣빛으로 살짝 물이 오른 갯버들, 양지쪽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들을 한참 들여다보며 몇 시간을 헤매다 돌아왔다. 마냥 한가로웠지만 결코 심심하지 않은 시간들, 따사로운 봄날을 만끽한 하루, 같이 하실래요!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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