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야 Nov 06. 2023

할머니의 쓸데없는 걱정

모범생 훈이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할머니를 외치며 들어옵니다. 영어시험을  결과가 흡족한 모양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알파벳 위주로 놀이처럼 해오던 영어가 초등학생이 되자 단어를 쓰고 문장까지 나오니 무척이나 버거운 듯 힘들어했던 훈이가 이제 요령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단어시험인데 한번 연습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수업시간에 들어 다 안다고 그냥 실력대로 보겠다며 학원에 갔었거든요. ㅎ


이제 제법 단어 쓰기도 순삭으로 끝내버리고 오히려 할머니를 시험하려 드네요. 그래봐야 예전 콩글리쉬 발음이 어디 가겠어요. 할머니의  발음에 키득이다 원어민 못지않게 혀를 돌돌 굴리며 보란 듯이  알( r)이 아니라  이라며 할머니를 놀려대곤 합니다. 학원 선생님께서도 최고의 모범생 이라며 늘 칭찬해 주시고. 수업시간만큼은 집중해서 듣는다 하니 기특하기 이를 데 없네요. 물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랍니다.


가끔씩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오늘은 필로티에서 친구들이 뛰고 소리 질러서 선생님께 단체로 야단을  맞았다며 속상해합니다. 

'그럼 우리 훈이도 같이 뛰었어!'

'아니요'.

'그런데도 다 같이 혼나서 속상했겠다'.

'친구 몇 명이 자주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하고 그래요'.

'에고 선생님께서 참 많이 힘드시겠다'

했더니 옆에 있던 3학년 윤이가

'우린 그런 친구들 없어'

'그럼 3학년이 되면 그 친구들도 괜찮아질 거야, 속상해도 참을 수 있지'

'네!'


형제간인데도 어쩌면 그리 다른지요. 물론 나이차가 있으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윤이는 생각이 많으면서도 명석한 편인 것 같습니다. 평상시 별로 공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놀 궁리만 하는 것 같은데도 집중해서 한번 하면 잘 해내곤 합니다. 그러니 안 한다고 뭐라 하기도 그렇고 늘 내 속만 부글부글 끓이다 내려놓을 수밖에요. 어쨌든 레벨테스트를 하면 척척 올라가 주니 할 말이 없고, 학교에서 칼림바도 열심히 하고, 수업도 잘 따라간다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반면에 훈이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합니다. 학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전히 단어 쓰기를 하고, 리스닝을 하고. 슈퍼팟도 하고, 온라인 영어학습까지 성실하게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해냅니다. 금요일엔 4교시라 집에 왔다 학원을 가는데 45분에 딱 맞춰서 가는 윤이와 달리 30분이 지나면 가방을 들고 나섭니다. 일찍 가서 한번 훑어보고 수업에 들어간다네요. 또래보다 작아도 하는 짓은 똑 소리 나게 잘 해내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염려가 니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려 애쓰고, 마음이 여리고 맑고 순수한 영혼인 우리 훈이가 행여 마음 다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고  할머니는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합니다. 덩치도 크고 자기주장도 강한 윤이는 감히 누가 건드리는 경우는 없는 듯싶은데, 작고 귀엽고 착하게 생긴 훈이는 여자아이들마저 지우개를 말없이 가져가서 잘라놓고, 자꾸 건드리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에 대해 크게 마음 상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염려스러워 강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줍니다.


작은 장난에는 웃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반복되거나 많이 속상하면 언제든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집에 와서 꼭 말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물론 아니다 싶을 때는 참지 말고 바로 네가 이러면 나는 기분이 나쁘니 하지 말아 달라고 당당하게 말을 해야 한다고도 일러주는데 잘 해내겠지요. 아직은 큰 어려움 없이 다니는 것을 보면 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요즘 더 절실하게 느끼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의식주만 해결해 주면 되던 시절이 아니다 보니 더욱더 마음이 쓰이고 고민도 하게 됩니다. 급변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기 이를 데 없지만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에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해 줄 밖에요.


다만 끼니 잘 챙겨주고 맛있는 간식도 만들어 주며 세상에는 너희들을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돌봐줄 뿐입니다. 점점 더 자랄수록 감당해 내야 할 일들은 많아지고 알아야 할 범위도 넓어져 갈 텐데 왜 이리 제 마음만 부산스러운지요. 부디 우리 세 꼬맹이들이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한 계단 씩 쉬엄쉬엄 오르며 어쩌다 마주하면 활짝 웃어줄 수 있는 해맑은 이들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잘 자라주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아프면 난 슬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