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다. 특히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며 과연 그 말의 진위여부와 비밀유지가 필요한지를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이 말하는 자, 한 사람만의 주관적 입장에서 나온 말인데 일반화가 될 경우 말속의 주인공들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사회적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유지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상담을 했던 사람으로서 1순위로 생각하지만 항상 "너만 알고 있어" 라며 다른 사람 험담을 해대는 소리를 들을 때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결국 이 사람은 내 험담을 하면서도 상대에게 그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뢰의 문제다. 다음 이야기를 쓰려고 서론이 길어졌다. 고로 H 한 사람만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니 부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차를 가져가야 하나 아니면 몇 정거장인데 걸어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남편이 선뜻 태워다 주겠단다. 좀 서두른 관계로 일찍 문화센터에 도착했는데 문 앞에 나보다 먼저 오신 분이 있었다. 같이 들어가서 눈인사를 나누며 앉았는데 강사님이 오시고도 시간이 남아 다른 수강생들을 기다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본인(H로 칭함)은 욕심이 많아서 한주에 몇 번씩 해서 빨리 배우고 싶단다. 역시 시작부터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H는 서울에서 살다가 귀농을 꿈꾸던 중 멀리 전망 끝내주는 바닷가 앞에 집과 밭 500평을 사서 어촌마을에 정착한 지 8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발이 아파서 이곳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와서 수술을 할 예정이고, 수술 후 치료하며 머무는 동안 캘리그래피를 배우려고 한단다. 이유는 500평 텃밭을 가꾸면서 텃밭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회원수가 2천 명이 넘다 보니 일일이 관리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 자지만, 예쁜 글씨를 배워서 카페에 올리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해 보려고 한단다.
거기까지는 왜 배우고 싶은지였다면 귀촌이라는 것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8년이 되었는데도 그 텃세에 시달리고 있단다. 특히 그곳은 경제력이 좋은 편이어서 부족함이 없는 편이고 드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광시설이 한참 유행이던 시절 집 앞 조망권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은 마을사람들과 행정담당자들과 모두 한패로 고충을 겪던 중 신문고를 통하여 승소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거주 3년 이상되면 태양광에 대한 수입을 나누어 줄 수 있다더니 3년이 되니 5년으로, 5년이 되니 7년으로 그러면서 아직도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날은 H의 울타리 안에 무화과가 익어가는데 마을사람들이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바구니까지 들고 와서 가득 따갔다는 것이다. 왜 말리지 그랬냐 했더니 시골인심이 그런 거라 했단다. 이건 뭔 논리인지. 또한 어느 집은 집 지으려고 땅 파고 수도를 놓으려는데 그 수도를 마을사람들이 끊어 놓아서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고 마을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다 시장에 나가면 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본토박이 텃세가 심해서 외지인이 정착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텃밭에 여러 가지 특용작물을 심고 가꾸거나 귀한 씨앗들은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텃밭카페회원들과 교류하는 재미에 살고 있다고 한다. H는 귀어에 성공한 사람보다도 더 신나게, 어찌나 재미있게 말을 하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캘리그래피 첫 수업을 시작도 전에 H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가 막상 수업이 시작되니 그다음이 궁금해서 그 수업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ㅎ 더구나 자기소개가 끝난 후 강사님께서 어찌나 서둘러서 진행을 하시는지 나에 목적과는 다르게 정신이 없었다. 한 시간 반을 쉬지도 않고 선 그리기를 하나 싶더니 시간에 쫓기며 엉성한 작품까지 완성하느라 힘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분명히 나는 자기소개 시간에 배우고 싶은 이유 2가지를 말했었다. 첫 번째는 마음을 편안하게 정리하면서 힐링이 되는 시간이 필요해서 선택했고, 두 번째는 주식에는 망했지만 한컴에 감사하며 사는 한 사람으로서 예쁜 글씨로 생일축하카드나 편지를 써주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젊은 몇 분은 자격증에 도전해 보려고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내가 이해하고 넘겨야 할 부분이지만, 다음시간에는 내 페이스를 찾아 천천히 가야지 싶다.
어쨌든 캘리그래피 시간보다 H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물론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하겠지만, H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은 순수한 시골인심이 남아있기를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아니 남아있을 것이며 H의 이야기는 아주 일부분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6시 내 고향, 생생정보, 고향은 지금 등 산촌, 어촌, 농촌소개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시골출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