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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pr 18. 2024

노란 봄을 들이던 날

아낙의 외침

어디선가 프리지아향이 바람결에 밀려온다. 너무 강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게 은은하게 스쳐가는 향기에 이끌려 취한 듯 발걸음이 그곳을 향한다. 커다란 양동이에 한아름 꽂혀있는 후리지아가 노란 봄을 길게 노래하며 스치는 이들의 후각을 간질간질 유혹하는 봄이다. 매년 하던 것처럼 더도 덜도 말고 작게 묶여 있는 노란 봄을 한단 사들고 왔다. 작은 화병에 꽂으며 두고 온 꽃들을 그리워할 노란 봄에게 미안함도 잠시 내 곁에 있는 동안 온마음을 다해 너를 보살피겠노라 지키지 못할 약속을 또 해버렸다.


삶이 팍팍할 때도 시장통 모서리 어디에선가 전해져 오는 향기에 이끌려 가보면, 꼬질꼬질 거무죽죽하게 물든 손으로 좌판에 깔려있는 꽃들을 손질하던 주름진 아낙의 외침이었다. 콩나물 1 봉지 500원 , 두부 1모 500원 대신에 그 아낙의 고단함이 서려있는 리지아 1단을 사들고 왔다. 시장통을 벗어나 언덕길을 오르고 구불구불 골목길안 두 번째 마당 깊은 집. 어둠침침한 구석진 주방이 노란 봄의 정착지다. 촉수 낮은 형광등 아래 몇십 년이 되었는지도 모를 낡은 찬장에는 오래된 그릇들이 그득했고, 일곱 식구의 밥을 짓는 손길은 늘 바지런해야 했다. 그럼에도 좁아터진 주방에 큰맘 먹고 들여놓은 월넛식탁에 앉아 노란 봄을 맞이하는 그 시간만큼은 작은 희망들이 선명해지곤 했다.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는 꽃말이 아니더라도 노란 봄을 마주하면 새로움이 움트고, 노란 병아리가 종종걸음을 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앞니 빠진 아이들이 눈에 선하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송이 두 송이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히며 보란 듯이 자태를 뽐낸다. 예전만은 못한 향기지만 노란 봄 한 줌에 며칠은 행복에 겨워 아침마다 인사를 나누며 고마운 마음 듬뿍 담아 맑은 생명수를 선사했다. 봄햇살이 길게 늘어지던 주말, 창문을 열어보니 코앞까지 분홍봄이 달려와 거침없이 물들이고 있다. 그 화사함에 려 나가 보니 아파트 정원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를 지경으로 화들짝 피어난 벚꽃아래 너도나도 환영의 몸짓으로 손가락 터치는 멈추질 않는다.


~ 지금이 절정이야!

더 화려한 분홍봄을 찾아 떠날 생각에 사뭇 설레는 주말이다. 노란 봄은 까마득히 잊은 채 세상의 분홍빛들이 총출동을 했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벚꽃터널에 넋을 잃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저마다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봄날이 정성스럽기만 하다. 그 정성에 감복한 수많은 인파들의 면면은 해맑기 그지없고 사랑이라는 단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도 한참 모자랄 만큼 황홀경의 풍경들에 다정함들이 수없이 스친다. 그렇게 분홍봄에 홀딱 빠져버렸으니 집에 두고 온 노란 봄은 쓸쓸하다. 생명수는 고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바삐 나가버리고 노란 봄은 그렇게 슬픔의 을 걷는다.


설렘을 안고 들여왔건만 정작 내 안에 있는 그것을 돌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줄도 모르고 잊고 있었다. 그 아낙의 외침을. 하루아침에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쌓이고 그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가끔은 몸도 마음도 느슨해지는 날이면 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그 길을. 잘 살아왔다고 토닥여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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