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 엄마의 요양병원 입소가 결정되었다..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엄마 몸에 달려있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집으로 가시면 며칠을 못 견디시고, 요양병원으로 가셔서 지금처럼 케어를 받으신다면 그나마 2~3개월은 견디실 거라는 의사 선생님 소견이다. 우리 5남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환자실문이 열리자 코에 줄을 꽂은 채 침대에 누워 미동 없이 눈만 깜박이며 실려 나오는 여윈 엄마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링거 자국으로 퉁퉁 부어오른 손을 잡고 엄마의 온기를 느끼며, 그래도 폐렴을 잘 이겨내고 나와줘서 고맙고, 다시 엄마 얼굴을 볼 수 있어 감사했다. 곧바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응급차에 올라 요양병원까지 가는 시간은 짧기만 했다.
잠시지만 엄마 모습을 더 담아두고 싶어 애타게 엄마! 엄마! 부르며 초점 없는 엄마 눈동자를 따라가자, 엄마는 슬쩍 나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옆에 있는 올케언니에게
우리 큰며느리구나!
들기름 있니?
있으면 1병만 빌려 줄래!
올케언니는 엄마가 왜 갑자기 들기름을 찾으실까 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제 그 일로 인해서 그만 미안해해도 되고,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니 모든 걱정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엄마에게 그런 내 마음을 전할 길은 없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언니는 엄마 딸. 나는 아버지 딸이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으면 언니와 의논을 했고, 아버지는 그저 예쁜 막내딸 이라며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고구마, 감자, 인삼 등 당신이 키우신 것들을 살뜰히 챙겨 주셨다. 그랬던 아버지께서 엄마보다 먼저 내 곁을 떠나셨다. 어느 날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들기름을 여러 병 준비했는데, 작은 엄마들 드리고 나면 너를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명절이나 큰일이 있는 날이면 작은엄마, 며느리들이 다 자고 있는 새벽에 엄마는 아주 작은 소리로 내 귀에 대고 "희야 일어나라!" 하며 제일 먼저 깨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군말 없이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엄마를 도왔다. 그런 때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생강을 심어 초록빛 잎이 화초처럼 예쁘게 자란 것을 아들들에게만 줄 때도 무척 부러웠지만, 출가외인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작은 엄마들을 드리기 위해 당신이 배 아파 낳은 딸에게는 줄 수 없다니, 엄마에게 나는 그렇게 이 집 아들들 뿐만 아니라 작은 엄마들 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주 엄마가 준비한 것에는 내 몫은 빠져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건 엄마 결정이니까. 하지만 들기름 사건을 알게 된 언니는 그건 엄마가 잘못한 일이라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렇게 다정했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더 많이 의지하게 된 언니의 말 때문인지 최근 몇 년 동안 빠짐없이 맨 먼저 들기름을 큰 병 가득 챙겨주셨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엄마의 기력이 쇠약해지면서 자주 시골에 내려가 엄마 목욕도 시켜드리고 청소도 해드렸다. 그날도 부엌에서 엄마가 드실 반찬과 좋아하는 간식들을 챙기고 있었는데 나를 슬그머니 안방으로 부르셨다. 내가 너에게 더 정신이 없어지기 전에 주고 싶은 게 있다며, 바지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셨다.
"많이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구나"
상담사를 준비하면서 엄마와의 감정을 많이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부족했었나 보다. 엄마가 내미는 20만 원을 받아 든 내손은 떨리고 왈칵 쏟아지는 눈물로, 행여 들킬세라 잠시 고개 돌려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엄마가 나에게 주려고 이 돈을 조금씩 모았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당신이 떠나시기 전에 나도 엄마가 챙겨야 할 소중한 딸이었구나! 그 짧은 순간에 지금까지 고단하게 살아왔던 순간들 모두를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꼭 이 돈을 다 주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면 엄마 주머니가 비어버릴까 봐 엄마가 주고 싶은 그 마음 충분히 알고 있으니, 우리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 가지자고 설득하여 10만 원을 다시 엄마손에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몇 번이고 엄마가 준 돈을 매만지며, 그동안 엄마가 나를 어떤 딸로 생각하셨든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그동안 표현에 서툴기만 했던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5남매 중 막내와 함께 사는 엄마는 오직 아들 조석을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진 애를 쓰며 버텨왔었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치매는 점점 더 엄마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남동생이 엄마 조석을 챙기고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각자의 삶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이지만, 돌아가며 손을 보태며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집에서 돌봐드리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뒹굴거나 다치시고, 결국 낙상으로 인해 허리가 골절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에 농사를 짓고 있는 막내아들이 봄이 되면 들판으로 일하러 나가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엄마는, 더 이상 아들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요양원 입소를 선택하셨다.
아버지께서 요양병원에서 고생하시다 가시는 것을 본 엄마는 나는 내 집에서 살다가 가고 싶다며, 큰아들 집에 갔다가도 며칠을 계시지 못하고 돌아오셨던 엄마다. 그랬던 엄마가 자식을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하셨다. 그런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엄마를 편안하게 잘 보살펴 주실 곳을 찾아보는 것뿐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전화로 물어보고, 직접 가보고 하면서 공기 좋고 아늑한 곳을 찾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요양원 입소 후 면회를 갈 때마다 더 마르고 기력도 없어지면서, 결국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폐렴이 어느 정도 호전이 되어 중환자실 퇴원을 앞두고, 나는 또 요양병원을 찾아봐야 했지만 별다른 선택이 필요치 않았다. 우리 5남매가 자주 찾아갈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필요서류를 준비하여 담당 선생님께 엄마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간단하게 검진을 마친 엄마는 바로 병실로 올라가셨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엄마와의 만남은 아쉽기만 했다. 오늘도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요양병원에 전화를 걸어 엄마의 안부를 묻고, 사시는 동안 고통스럽지 않게 지내실 수 있도록 부탁드리는 것뿐이다.
엄마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