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이른 아침이면 부지런하신 반장님께서 "오늘은 통기타 수업이 있는 날 빠짐없이 만나요"라는 단톡을 올리신다. 예전 같으면 "네 참석해요"라고 댓글을 남기겠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셔서 당분간 수업참여를 할 수 없다고 미리 문자를 드렸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지금 내가 직접 돌봐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며 기타를 치고 싶지가 않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시던 날 거실에 있던 기타를 모두 치워버렸다. 수없이 다짐했던 것처럼 엄마가 가시는 길에 마음만이라도 온전히 함께 하고 싶다.
6년 전 아버지께서는 파킨슨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때는 아버지 곁에 엄마가 계셨고, 내가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 쪼개어 면회만 다녀왔을 뿐 마지막 가시는 길을 살뜰히 챙기지 못했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쯤 기타 수업시간이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시던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비처럼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나 왜 이러지?"
울고 있는 나도 당황스러웠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도 흐르고, 마음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지지리 가난한 집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19살의 나이에 20살인 엄마를 만나 우리 5남매를 낳으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집안이 어려워 결혼식도 없이 사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진작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해드렸을 텐데, 이미 늦어버려 후회로 남을 뿐이다. 비록 가난해서 자식들을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는 못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식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시거나 다투신 적이 없었다. 매일 새벽부터 밤늦도록 정말 열심히 일하셨고, 점점 생활이 나아지면서 살고 있던 집도 사고 농사지을 땅도 사셨다. 그리고 아버지 환갑이 되시던 날 당신 손으로 친인척을 비롯해 인근 지인들을 모두 초대해 보란 듯이 성대하게 축하잔치를 하셨다. 그 노래를 왜 좋아하셨는지 모르지만 그날 부르셨던 노래다. 그냥 그 노래가 나오는 순간 아버지가 생각나고 미안하고 보고 싶었나 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집을 떠나 타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5년의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으니 부모님과 함께 산 시간은 가난하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뿐이다. 생각해 보면 분명 어려운 속에서도 기쁘고 아름다웠던 추억도 많았을 텐데 이기적 이게도 나만 힘들고 고단하게 살았다고, 원망만 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힘든 살림에 중학교를 보낼 수 없다고 했을 때 언니는 동생만큼은 꼭 보내달라고 애원하고, 담임선생님까지 가정방문을 하셔서 부탁하시는 바람에 어렵게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기마다 돌아오는 육성회비는 분명 부담이 되셨을 텐데 아버지는 딸아이가 학교에서 행여 곤란해질까 싶어서인지 오빠나 남동생보다 항상 먼저 챙겨 주셨다. 그리고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동네 친구들은 땡볕에 나가 일했지만, 딸들이라는 이유로 되도록 논밭일은 시키지 않으셨다.
어렵게 입학한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에 실업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때는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내가 입학한 학교는 방직회사에 입사해야 갈 수 있는 부설학교로 추후 실업고등학교로 승인이 되면서 나는 정식으로 고졸이 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아이가 시작한 공장생활은 고단했고, 동생까지 뒷바라지하며 겪었던 생활고는 나만 왜 이렇게 고생할까. 나를 전혀 돌보지 않는 부모님을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하지만 그 3년의 시간들이 오히려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 어떤 일도 그때만큼 힘들지는 않았기에 충분히 잘 이겨냈고,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5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형편이 나아지면서 아버지께서는 정말 행복해하셨었다. 하지만 아버지, 엄마는 너무 힘들게 살아오신 탓일까 차례로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 다행히 재활을 열심히 하셔서 잘 극복하셨지만, 아버지는 파킨슨이라는 몹쓸 병이 또 찾아와 오랫동안 약을 드시며 치료를 하셨지만 서서히 굳어져가는 그 병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입. 퇴원을 반복하다 결국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작은 체구인 엄마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 난 아버지께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말을 했다. "아버지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이제 편한 곳으로 가셔도 돼"라고 말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이승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내 마음대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버지 생각한답시고 그랬던 것이 너무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엄마가 아버지께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엄마, 그건 엄마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것을 어떻게 해" 하며 엄마를 달래곤 한다.
지금의 엄마처럼 아버지도 코에 줄을 삽입해서 유동식을 드시고 어렵게 투병생활을 하셨다. 이제 더 이상 어렵겠다는 병원 측 연락을 받고 그렇게 아버지께서 그리시던 집으로 모셨다. 여기저기 달려있던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편안하게 누우신 아버지는 당신이 평생을 사셨던 안방을 빙 둘러보셨다. 그리고 자식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춘 후, 5남매 손을 잡은 채 고요하게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
이제 또다시 엄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마주하게 될 나는, 아버지를 보내드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보내고 있다. 이미 시한부가 되어버린 엄마의 시간들이기에 엄마는 지금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지만, 아직 같은 하늘아래 숨 쉬고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고 감사하다. 하지만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내 욕심만 앞세우는 것일까. 그럼에도 아직은 엄마를 보내드리고 싶지가 않아서, 오늘도 내가 마음에 준비가 될 때까지만 이라도 이 세상에 있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