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마가 있는 요양병원에 면회예약을 해 놓아서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계신 요양원 간호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어젯밤에 어머니가 소변줄을 뽑아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문의였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통화를 하기로 했다. 서둘러 요양병원에 도착해 진단키트로 음성임을 확인한 후에야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부쩍 여위어진 엄마 모습은 그저 안쓰러움 뿐이다. 다행히 오늘은 조금이나마 의식이 있어 흐릿한 눈빛이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온 힘을 다해 당신하고 싶은 말들을 중얼거리듯 뱉어내셨다.
"나 아버지가 보고 싶다"
"나 아버지가 보고 싶어"
엄마의 애절한 절규로 들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엄마, 지금 너무 추워. 따뜻한 봄에 아버지 보러 가자" 내 말이 들렸을까? 아버지 돌아가신 후 사는 것이 고단하다고 빨리 아버지 보고 싶어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제 점점 그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요양병원에서 고생하시던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고 이제 보내드리자고 결단을 내리셨던 엄마였다. 그런데 당신이 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우실까.
또다시 간호팀장님 전화가 걸려왔다. 다행히 시어머니께서 소변줄을 제거하고도 잘 적응하고 계시니 이대로 진행하겠다고 말이다. 2년 전부터 한차례 씩 빈혈수치가 낮아서 수혈을 받고, 큰 염증이 생겨 입원치료를 하기도 했다. 올해는 추석 무렵 갑자기 패혈증이 와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가 고비를 잘 넘기시고 퇴원을 하실 수 있었다. 이번에는 위험한 단계는 넘기셨지만 전보다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걱정했었다. 다행히 잘 드시고 6년째 계시던 요양원이다 보니 빨리 적응하시고 전처럼 회복이 되신 것 같다
서울에서 5년간의 직장새활을 하면서 많이 외로웠었나 보다. 나는 결혼이라는 탈출구를 선택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1주일쯤 후였을까 혼인신고를 하려고 서류를 준비하는데 호적등본에 내가 알고 있던 시어머니 존함이 아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었다. 오히려 화를 내며 그 시절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 시절 이미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마당에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호적에도 없는 시어머니와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과 출생은 남편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신혼 초에 앞으로 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이혼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고 왜 했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난 그 약속 때문에 몇 번의 위기에도 잘 참아냈고, 요즈음 서로 대화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 책임져야 할 가족들과 빚만 남기고 가신 시아버님으로 인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 욱하는 성질 때문에 마음고생하며 이다음에 나이 먹으면 내가 당한 만큼 구박(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를 낳고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낯선 여자분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집에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다. 그때 시어머니께서 내게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내가 이 집 맏며느리인데, 그분이 당신 첫 번째 며느리이고 손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슨 생각에 그 상황에 손님이라고 치킨을 시키고 저녁을 해서 함께 먹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이 집에 오기 전에는 교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론 그분을 다시 보지 못했다
시어머니께서는 남편을 잃고 어렵게 아들을 홀로 키우던 중에 딸 하나를 두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는 나름 넉넉했던 시아버지 두 번째 식구로 들어와 7남매를 낳으신 것이다. 나중에 시고모님, 시작은 어머니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흉보듯 시어머니를 무시하듯 그렇게 이 집에 오시게 된 과정을 알게 되었다. 난 그런 시어머니가 더 이상 무시를 당하시지 않도록 이 집에 오면서 말소되었던 주민번호도 찾아드리고, 못하는 것이 없는 시댁 어른들께 칭찬받는 부지런한 맏며느리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시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고, 점점 치매와 거동까지 어려워지시면서 요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올해가 지나면 97세가 되시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내 인생 최대의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열심히 살아온 결혼생활 30년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왔을까. 결혼할 당시 막내 시동생이 중학생이었다. 남편 혼자 벌이로 시동생 학비를 대며 두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월급날이 다가오기도 전에 돈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결혼패물을 처분해서 쌀을 사고. 알뜰살뜰 지독하게 살아냈다. 물론 이때도 살림에 부업에 아르바이트 등 가리지 않고 했다.
다행히 없는 살림이지만 시동생들과 잘 지냈고 좋은 큰형수로 인정받는 것 같아 나름 행복했다. 허름한 주택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마당에서 매일 손빨래를 했고, 1주일에 다림질해야 할 와이셔츠가 20장이 넘어도 힘든 줄 모르고 뒷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둘째, 셋째, 막내시동생까지 결혼을 시킨 후 과감하게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미련 없이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 정착한 뒤에도 아이들 학원비. 과외비라도 보태고 싶어 마트에서 일을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잘 커주었고, 고맙게도 우리가 살았던 서울로 대학을 갔다. 아이들도 이제 성인이 되어 내 보살핌보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사이에 85세를 넘기신 시어머니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부지런하시던 분이 씻지도 않으시고, 방청소도 안 하셨다. 어쩔 수 없이 매주 목욕을 시켜드리기 시작했고, 치매진단까지 받게 되어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동도 불편하시고, 특히 대소변처리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기저귀를 채워드리면 어느새 빼서 장롱 속에 넣어 놓고는 해서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감당이 안되어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런 나를 이해는커녕 오히려 서운해했다. 모두가 외면한다고 그대로 살 수도 없었다. 결혼해서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가시는 날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내손으로 발품을 팔아 공기 좋고 작은 정원까지 있는 아담한 요양원을 찾아 모시게 되었다.
친정엄마보다도 훨씬 더 함께 살아온 날들이 많은 시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신지도 6년이 되어간다. 여전히 면회 때마다 우리 큰며느리 왔다고 반기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신다. 시어머니께서 언제 떠나셔도 후회되지는 않는다. 요양원에 가시기 전 5년 넘게 목욕시켜 드리면서도, 치매로 어떤 실수를 하셔도, 아프신 분이라 생각하며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사는 동안 소리 내어 다툰 적도 없고, 힘든 시절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누구나 삶의 끝은 있기에 앞으로 얼마일지 모르지만 어디에 계시든, 내가 주보호자로서 마지막까지 책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