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나의 마지막 직업은 상담교사였다

by 희야 ㅡ 박상희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신지 1달이 지났다. 며칠 전 면회 갔을 때만 해도 잘 계시나 싶었는데 12월 22일 패혈증이 와서 항생제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 반복적으로 패혈증이 올 수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엄마에게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오다니, 나에 심장을 조여 오는 느낌이다. 눈은 내리고 날씨는 추워지고 혹여나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실까 봐 남동생은 아버지산소 옆에 마련되어 있는 엄마자리를 더 얼지 않도록 비닐로 덮어놓았다.


우리 5남매는 1주일이 멀다 하고 돌아가며 면회를 가고 있다. 다행히 엄마의 시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양병원에서는 갈 때마다 친절하게 면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 며칠 전 큰올케가 면회를 갔는데 유동식밖에 못 드시는 엄마가 '희야는 사탕도 사 왔는데 너희들은 그냥 왔느냐'라고 했단다. 엄마가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한 후 나는 시골에 갈 때마다 부드러운 빵과 과자, 사탕 등 엄마가 드실만한 간식거리를 떨어지지 않게 채워놓고는 했었다. 이제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니 목까지 울음이 차오른다.




딸에 이어 아들까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너무 감사했다. 학원비, 과외비 보태겠다고 엄마는 바쁘게 사는데, 아들은 누나에 비해 공부도 소홀히 하고 노는 것만 좋아해서 내 속을 태웠었다. 다행히 고3이 되면서 공부를 하는가 싶더니, 고맙게도 멀리 지방으로 가지만 말아 달라는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두 아이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나니 나름 잘 살아왔다는 안도감과, 나에게 이런 큰 선물을 안겨준 이 세상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때마침 지인이 상담자원봉사자를 하면 잘 할거 같다며 정보를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용기로 그리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무리 자원봉사자라 해도 어느 정도 전문지식이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자원봉사자 선배님들이 멘토가 되어 바로 교육현장에 나갈 수 있도록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기초교육을 체계적으로 해주셨다. 그 과정에서 늘 바쁘게 사느라 잊었던 나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인생그래프를 통해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참 고생 많았다고 토닥여 주기도 했다. 또한 나를 보살피지 않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며 많이 울기도 했었다. 그리고 친부모님이 아니어서, 아이가 아파서, 시집살이가 힘들어서, 너나없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봉사자의 길을 선택한 동기들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이 있는 마지막날, 멘토님들께서 내가 수료식에서 선서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셨다. 그러나 하필 그날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내가 군입대를 위해 가는 훈련소에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미안한 부분이다. 상담과정에서 멘토님의 피드백을 받으며 그동안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도 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셔서 지금 내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 입장을 미리 걱정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지도 않고 원망만 했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내가 말했더라면 부모님께서는 분명히 어떻게든 도와주셨을 것이다. 합리화 같지만 일찍 독립한 내가 너무 빨리 철이 들었거나, 부모님은 착한 딸이 잘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과정은 나의 선택이고 결정이었을 뿐, 부모님을 원망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엄마와의 이별을 앞에 두고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밤낮으로 일에 파묻혀, 눈앞에 있지 않은 자식까지 챙겨야 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아들이 가끔 서운한 감정을 비치곤 한다. 군입대 시 가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대학졸업 후 처음 취업한 직장이 창원이었는데 4년 후 그만두기 전까지 한 번밖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새로 구입한 자동차가 멈추는 바람에 담당자와 담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남편과 창원까지 먼 길을 번갈아 운전하며 다녀왔었다. 변명하자면 그 당시 치매가 시작된 시어머니와 딸이 결혼해서 낳은 손자까지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고단했었다. 그리고 남편까지 퇴직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삶은 혼란스러웠고, 갱년기까지 겹치면서 아들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추웠던 겨울 기초교육을 수료하고도 1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수없이 연습을 하고 근처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어찌나 떨리던지 집단상담 첫 시간을 어떻게 시작해서 마무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졌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들도 재미있었다. 가끔 학생들로부터 감사했다는 손 편지를 받았을 때 이것이 보람이구나 싶었다. 1년을 마치고 방학을 이용한 보수교육을 통해 교수님들의 상담에 대한 전문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이건 결코 열정만으로 봉사정신만으로 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바로 방송대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받고 4년 성적우수자로 졸업을 하였다. 지나고 보니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미친 듯이 공부만 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 청소년교육과를 졸업하면서 평생교육사,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방학을 이용해 사비를 들여가면서 미술치료사, 인터넷 중독 예방교육, 학교폭력예방교육 등등 서울까지 다니면서 상담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었다. 비록 상담자원봉사자이지만 보다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학생들을 만날 때 안심이 되고 당당한 기분이 들었다.




방송대를 졸업하고 자격을 갖추게 된 나는 마침 학교마다 상담교사를 채용하여 지원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계약직으로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지만 생각보다 상담교사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오전에는 상담수업을 들어갔고, 오후에는 상담자료를 준비하며 개인상담도 진행하였다. 또한 각 학년에 맞추어 ppt자료를 만드느라 집에까지 들고 와 컴퓨터에 능한 남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외부강사 초빙을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 결국 학부모교육까지 하면서, 그때 얼마나 떨었던지 지금은 좋은 추억이다. 설상가상 때론 학교선생님까지 상담을 해 오시는 바람에 난감했고, 방학에도 희망자에 한해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단기간에 수많은 경험을 했고, 학교라는 것이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다음 해 학교 측에서 수업시간과 업무를 줄여주겠으니 재계약을 원했지만, 난 조용히 교사의 길을 마무리하고, 퇴직한 남편과 유럽여행을 떠났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마는 대학 다니는 동안 학비도 못줘서 미안했는데, 선생님이 되었다고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 후 아이들이 모두 결혼하고 3명의 손주들이 태어나면서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달려가고 싶어 11년간의 상담자원봉사자 활동도 마무리하였다. 어쨌든 그래서 나의 마지막 직업은 상담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