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들 때마다 화면 가득 달려드는 파란 하늘. 더 파랗게 달려가는 남대천 물결에 온 마음을 잃어버렸다. 밤잠 설치고 3시간이나 달려온 보람 그 이상에 멋진 선물이다. 스위스에.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가도 가도 봐도 봐도 파란 하늘에 흰구름들이 너무너무 부러웠었다 그런데 오늘 양양에 하늘이 그 이상으로 파랗고 그 하늘에 빛을 닮아 물까지 더 파랗다. 내 온몸도 파란빛으로 물이 들어간다.
밤잠을 설쳤다.
소풍날을 앞둔 아~도 아니고, 나이 먹은 유세도 아니고, 우째그리 뭔 날만 앞두면 잠이란 것이 달아나 버리는지 고된 밤을 보냈다. 그렇다고 잠을 붙잡고 마냥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다. 혹여 하나라도 빠질세라 적어놓은 목록들을 확인하며 짐을 챙겼다.
새로 담근 배추김치, 살짝 익어서 아삭하니 아들이, 며느리가 맛있어할 것 같아 한통 담았다, 연한 햇마늘종에 멸치를 넣어 간장에 조리고, 마른김을 잘라 무치고, 잘 익은 파김치와어젯밤에 쑨 손녀가 좋아하는 올방개묵도 담았다. 제법 큰 보냉가방에 구석구석 얼음팩까지 끼워 넣으니 더 이상 공간이 없다.그뿐인가 손녀가 주문한 포도와 젤리, 고모(내 딸)가 챙겨준 막대사탕과 포켓몬카드도 들고 왔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겸 아들집 방문이다. 월요일이라 어찌나 트럭들이 많은지 한주에 시작으로 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다들 마음이 바쁜지 곳곳에 접촉사고가 나서 정체가 이어지고 운전하는 남편도 나도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이런 때는 나에 수다가 빛을 발할 시간이다.
40이 다 되어가는 우리 딸이 중3이면 도대체 몇 년 전인지 모르겠지만 한겨울이 지나고 봄방학쯤 고등학교 공부에 매몰되기전에 다녀오자고 떠난 여행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고 흐릿한 날씨지만 콘도도 예약해 놓았고, 그때도 오늘처럼 2박 3일 동안 먹을 것들을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싸들고 출발을 했다.
여행은 언제나 설레고 즐거운 법,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들에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휴게소에 들러 아들이 좋아하는 가락국수도 먹고 호두과자도 사 먹으며 가노라니 솔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고생길에 시작인 것을.
차는 정체되기 시작했고, 눈발은 굵어지고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쓸어내려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3시간, 5시간 , 7시간, 9시간 차 안에 있는 간식들을 먹어 치우며. 되돌아갈 수도 없이 3월이 코앞인 2월의 폭설에 갇혀버렸다. 겨우겨우 11시간 만에 제설차 뒤꽁무니를 따라 콘도에 도착하니 곳곳에 집채만 한 눈덩이들이 산을 이루었다. 1미터가 넘는 폭설에 우리 식구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늦은 밤 체크인을 했었다. 지금도 가끔 회자되며 잊지 못할 강원도 여행으로 남아 있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딸이 고3으로 하필이면 딸이 지원한 대학교 수시를 준비하는 기간에 졸업여행이 잡혔다, 수많은 고민 끝에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가는 여행을 포기하고, 시험을 보고 면접까지 거쳐 합격했었다. 그 포기조건에는 아빠의 제주도 여행이란 선물이 걸렸고, 합격이란 선물까지 들고 시어머니와 함께 다섯 식구가 행복한 마음을 안고 제주도를 다녀왔었다.
이런저런 추억들을 끄집어내어 수다를 떨다 보니 막혔던 길도 뚫리고, 목적지인 양양에 도착했다. 강원도 하면 감자옹심이, 그걸 먹기 위해배고파도 참고 왔다. 양양시장에 오면 늘 먹는 그 집에서 오늘은 대기 없이 들어가 구수한 감자옹심이를 먹고 나니 살 것 같다. 아니 많이 먹어 힘들었다. 그래서 산책 겸 간 곳이 갈대밭 위에 파란 하늘이, 파란 물결이 맞아준 남대천갈대밭이었다.
짐도 풀지 못한 채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들집에 왔다. 살림꾼인 아들이 물어볼 것도 없이 척척 짐을 풀어 제자리를 찾아준다.저녁은 며느리에 강력한 추천으로 송이전골로 정해졌다. 한적한 산자락옆 작은 호수에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송이향으로 양양에 밤은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