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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앞에서

by 희야
이 글은 이미 발행된 '아주 가끔은 이것이 나를 힘나게 한다'의 일부를 포함, 재구성하여 미야의 글빵연구소 졸업작품으로 제출하였습니다. 중복되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요양원 뜰에는 가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들어갈 때는 알아채지도 못했다. 손등이 붓고 멍이 들었는데 혹시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확인해 보면 좋겠다는 요양원 담당자의 전화였다. 운동 가려던 남편을 돌려세우며 점심 먹은 설거지도 미룬 채 서둘러 출발했다. 면회를 다녀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결혼과 함께 환갑이 안 된 시어머니와 중2가 되는 시동생과 살았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칠 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친척 집에서 직장 생활을 한 나는 5년 동안 주말도 없이 일만 하느라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맏며느리라니. 움푹 들어간 개인주택의 작은 부엌에서 밥을 하고 반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시골에서 태어난 남편이 고등학생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온 집에는 맷돌과 다듬잇돌이 있었다. 어려서 친정에서 본 물건들이기에 낯설지 않았다. 시장에서 사 온 콩을 불려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고 여름이면 콩국수를 해 먹었다. 햇볕이 쨍한 날에는 이불 홑청을 뜯어 새하얗게 빨아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리며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새하얀 홑청이 빳빳하게 펴지듯이 구김살 없이 사는 날들이 즐거웠다.


시어머니는 엄한 시할머니께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기에 며느리와는 살가운 고부간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 시어머니의 바람대로 나 역시 내성적이기만 했던 성격에서 밝고 나긋나긋한 며느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솟았을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방긋방긋 웃으며 일가친척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드나드는 식구들은 많고 남편의 외벌이로 시동생 학비까지 책임지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버겁기만 했다.


비어 가는 통장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날들. 가족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뒤로하고 작은 아이가 유치원생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치운 뒤 10시에 출근하여 아들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시장을 한가득 봐 들고 퇴근하여 저녁을 해 먹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를 부려 먹는다는 시누이들의 원성에 1년 만에 그만두었다. 틈나는 대로 부업이란 부업은 다 했지만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면서 저녁까지 해 놓고 오후 파트타임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통장을 불리며 막내 시동생까지 결혼시키고 꿈에 그리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드디어 남편 직장과 근거리인 이곳으로 2000년 8월 여름의 끝자락에 이사를 왔다. 온전히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마련한 집이기에 새로운 집기들로 채우며 나만의 살림이라는 것이 행복했다. 시어머니께서 원하시던 안방을 내드렸어도 서운하지 않았다.


매일 의복을 곱게 차려입고 화장하고 노인정에 다니시며 며느리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셨다. 늘 그럴 줄로만 알았던 세월은 어머니의 기억을 한 조각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뒤늦게 청소년 교육학을 전공하고 어렵게 들어간 초등학교 상담교사를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몇 년 동안 말없이 목욕을 시켜드리고 의복을 챙겨드렸다. 종국에는 그렇게 깔끔하고 부지런하던 분이 생리적인 부분까지 실수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눈물을 머금고 거동까지 어려워진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가시는 날까지 내 손으로 돌봐드리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죄스러운 마음에 많은 시간을 괴로움으로 보내야 했다. 시어머니께서는 이 며느리를 위해서인지 어렵지 않게 그곳에 적응을 해주셨다. 그 세월이 10여 년이 흘러 올해로 백수(白壽, 99세)가 되었다.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가는 일들도 있었지만 요양원과 합심하여 시어머니를 지켜냈다. 비위관삽입(콧줄 식사)까지 한 시어머니의 미래에 대해 의사도 낙관적이지 않은 적도 있지만 기적같이 이겨내시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이렇게라도 이승에서 함께 해주시는 시어머니가 더없이 감사하다.


만나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손등이 아프다며 내미는 손을 잡으며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혹여나 금이라도 가서 부목이라도 대야 한다면 이걸 또 어떻게 감당해 내실지 미리 걱정이 앞섰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기에 그냥 두고 있지 않을 시어머니기 때문이다.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모두 다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지만 멍이 들고 부었을 뿐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었다.


그제야 안도하며 급하게 가느라 물 한 병도 챙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받아 들고 아래층에 있는 마트에서 좋아하시는 음료를 사드렸다. 아들, 며느리를 본 것만으로도 다 나은 것처럼 휠체어에 앉은 채 손을 흔들며 돌아가시는 모습에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방으로 올려 보내고 나오는 요양원 뜰에는 작년처럼 국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 자리에서 저 노오란 국화꽃과 마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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